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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정주영과 이병철을 꿈꾸다 - 당돌함의 이준석이냐, 노회함의 김어준이냐 ⑦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1-09-06 18: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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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플러의 수제자 청년 김어준


김어준은 김대중과 이회창을 내세워 정주영과 이병철이 되기를 노렸다. 이미지는 자작나무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날로그 「딴지일보」의 책표지 (이미지출처 옥션)

필자가 딴지일보에 몸담은 기간은 딴지일보 역사에서 매체의 이름값 하나에 기대어 허장성세를 일삼으며 근근이 버텨나간, 요즘 유행어로 ‘존버’한 전형적인 외화내빈의 시기에 속하는 때였다. 먼저 화려한 겉면부터 살펴보자.

 

딴지일보가 출범 초기에 거둔 외형적 성장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성공담(Success Story)이었다. 김어준은 한국에서는 최초로, 어쩌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온라인에 기반한 디지털 뉴미디어의 가능성과 파괴력을 발빠르게 포착한 선구자적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현재는 아득한 추억 속으로 사라진 PC 통신 시절 천리안 자유게시판에서 필명을 이미 널리 날린 바 있다. 김어준은 글만 잘 쓰는 고전적인 지식인 유형의 선비적 논객이 아니었다. 그는 앨빈 토플러가 힘주어 강조한 미래의 물결의 방향과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했고, 대망하던 미래의 물결이 마침내 인터넷이란 형태로 출현하자 망설임 없이 거기에 즉각 몸을 실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수완과 재주에서 김어준은 가히 당대 최강의 기획자이자 행동대원이었다.

 

청년 김어준의 발랄한 창의성과 능글맞은 유연성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근본 없음’이 그 밑바탕이었다. 김어준은 정파의 제약과 이념의 굴레에 갇힌 학생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다. 세상의 흐름과 담을 쌓고서 차가운 육법전서만 달달 외우며 개인의 입신양명을 노렸던 고시 출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류도 아니고 삼류도 아닌 어정쩡한 위상의 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평범한 공학도에 지나지 않았다.

 

수만 명의 학우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전대협 의장님들이 보시기에 무명의 공대생은 무식한 공돌이일 뿐이다. 고시에 합격한 다음 출셋길을 달려온 엘리트 관료나 법조인들에게 그저그런 대학을 나와 시시껄렁한 직장생활을 하는 월급쟁이는 지질한 잡놈일 따름이다.

 

허나 김어준은 무식한 공돌이었던 까닭에, 지질한 잡놈이었던 덕분에 기존의 가치와 관념에, 전래의 질서와 체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나중에 오는 자가 먼저 되는 경우의 모범적 사례였다.

 

김어준의 거대하고 신속한 성공은 그가 명함에다가 본인의 직함을 ‘딴지일보 총수’로 새겨넣은 일화에서 다시금 뚜렷이 확인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김어준이 우리나라의 낡고 경직된 재벌경제 시스템을 풍자적인 조롱하는 의미와 의도로 총수를 자처했다고 믿었다. 이는 김어준이 흉중에 품은 야망의 크기를 모르는 성급한 속단에 불과했다.

 

31살 김어준, 32살 김우중을 제치다

 

김어준은 현대그룹 총수 아산 정주영(1915~2001)이나,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에 필적하는 돈 많고 힘센 전설적 기업인이 되기를 진짜로 바라고 꿈꿨다. 딴지일보는 김어준의 현대건설이고, 삼성물산이었다.

 

나는 수백억 원의 귀중한 현금을 당장 손에 쥘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일보의 딴지일보 인수 제안을 결국은 마다한 근본적 동기는 김어준 총수가 딴지일보를 첫 번째 계열사로 삼아 야심차게 출범한 딴지그룹의 미래가치를 최소한 수천억 이상으로 평가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미구에 수천~수조 원의 천문학적 가치가 나갈 게 틀림없는 전도유망한 내일의 유니콘 기업을 달랑(?) 수백억에 팔기를 종용했으니 김어준 눈에 문화일보는 손에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순전히 날강도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김어준이 딴지일보의 잠재적 가치를 최소한 수천 억으로 산정한 일에는 그가 출판시장에서 수확한 일련의 혁혁한 성과들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김어준이 딴지일보 누리집에 게재된 다채로운 글들을 묶고 정리해 도서출판 자작나무에서 펴낸 책들은 출간될 적마다 베스트셀러 대열에 속속 진입했다. 유수의 재벌회장들이 자필로든 대필로든 써낸 책들도 임직원들이 서점 매장으로 총출동해 사재기 수법까지 동원해봐야 고작 몇 천 부 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그전에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내놔 장안의 지가를 한껏 올린 사례가 존재하기는 했다. 핵심은 해당 서적은 1936년에 태어나 2019년에 타계한 김우중이 기업을 일으켜 세운 지 사반세기가 지나서야 위에서 언급된 장악력과 존재감을 출판계에서 발휘했다는 점이다. 김우중은 한국나이로 서른두 살에 대우그룹의 모태이자 전신인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김어준은 그보다 한 살 어린 서른한 살에 딴지일보를 창업했다. 김어준은 딴지일보 창간 1년도 안 돼 책을 만들어 10만 부 판매고를 가벼이 돌파했다. 김어준이 김우중조차 30대 초반에는 감히 밖으로 내보이지 못했을 남다른 자신감을 일찌감치 갖게 된 일은 전혀 이상한 사태가 아니었다.

 

김어준은 물결의 전진방향은 정확히 예측했다. 그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은 물결의 수위와 속도였다. 물결이 빨라지면 성난 파도가 되어 주변의 모든 것들을 흔적 없이 휩쓸어가기 마련이다. 닷컴 거품의 급작스러운 붕괴에서 파생된 후폭풍을 김어준이 적시에 피하지 못했던 연유다. 그럼에도 김어준은 딴지일보의 장래를 여전히 극도로 낙관적으로 전망한 터였다. 김어준이 심각한 경영난에도 개의치 않고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을 딴지일보에 쉬지 않고 부지런히 탐색ㆍ초빙한 배경이었다.

 

필자가 딴지일보에 합류한 시점은 2002년 초여름 무렵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대여섯 명 가량의 인원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사실은 훨씬 더 많았다. 김어준 총수는 딴지그룹의 임직원이 30명에 이른다고 으스대듯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마저 정식 직원들만 계산한 수치였다. 필자와 같은 객원 필진은 셈에서 제외된 숫자였던 것이다.

 

나는 김어준 총수에게 동지애와 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김어준에 비교하면 명성이 턱없이 한참 모자랄지언정 나 역시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와 나란히 국내 4대 PC 통신의 하나로 군림하던 유니텔에서 나름 종횡무진 맹활약한 인간이었다.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다면 활약이 너무나 지나친 탓에 검찰로부터 집으로 불쑥 소환장이 날아왔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양복 입고 가는 곳이 회사가 아닌 서울지검이라는 사실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본디 검찰청은 뇌물 먹은 부패한 정치인과 뇌물 준 파렴치한 기업인 등의 세칭 사회지도층 인사들만 골라 부르는 ‘당신들의 국가기관’인 줄 알았다. 필자는 남에게 줄 뇌물도 없었고, 남으로부터 받을 뇌물도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은밀하고 음습한 돈거래는 일종의 출세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통신사는 달랐으되 단지 PC 통신에 글을 자주 올렸다는 게 계기와 빌미로 작용해 온갖 풍상과 곡절을 겪었다는 점에서 나는 김어준에게 동지애를 품어왔었다. 더욱이 PC 통신에서 진보개혁 성향으로 글 좀 쓴다는 이들을 오프라인 공간에서 실제로 만나보면 백이면 백, 학생운동에 관여한 경력과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대다수가 소위 메이저 캠퍼스 학벌이었다. 김어준은 나처럼 비명문대를 다닌 일반학우였다. 그를 향한 나의 동질감과 동류의식이 진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⑧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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