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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와 김부겸의 동병상련 - 민주당을 파괴해온 뺄셈의 정치학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4-05-17 22: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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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22대 국회의장 선출 당내 경선 탈락은 그가 민주당 계열 정당에 내린 세 번의 커다란 시험에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미지는 MBN 시사 토크쇼 「판도라」에 출연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후회의 심정을 다시금 피력하는 추미애 전 장관의 모습

추미애가 졌다. 2024년 5월 16일 목요일,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장단 후보 선출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당선자 총회에서 6선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5선의 우원식 의원에게 9표 차이로 패배했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장은 원내 1당에서 배출되는 것이 관례로 정착돼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4월 10일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한 사실을 감안하면 우원식 의원은 다음 달 개회될 예정인 22대 국회의 첫 본회의에서 차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될 게 확실시된다. 이날 총회에서는 4선의 이학영 의원을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 후보자로 뽑았다.

 

그런데 언론의 조명과 여론의 관심은 승자인 우원식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패자인 추미애에게 오롯이 집중되는 양상이다. 이른바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라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 상황에서 우원식이 추미애를 꺾은 사태는 적잖은 파장과 후유증을 남길 충격적 이변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추미애가 우원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배경과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손꼽히고 있다.

 

첫째는 이재명 대표의 독주체제에 대해 그동안 당내에 잠복해 있던 반발과 견제심리가 국회의장 경선을 계기로 일시에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이 대표의 최측근인 박찬대 의원의 강압적인 교통정리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추미애가 수시로 보여온 돌출 행보가 정권탈환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떠안은 민주당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한 성격의 소유자일 우원식을 택했다는 진단이다. 당선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집단지성이 작용했다는 시각인 셈이다.

 

셋째는 약간은 음모론적 관점의 독법으로 잠재적 차기 대권주자들 중 한 명일 추미애를 이재명 대표 진영이 밀어주는 척하며 실제로는 낙마시켰다는 견해이다. 이재명이 추미애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의도적으로 흔들었다는 얘기라 하겠다.

 

총회에 참석한 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일일이 전수조사하지 않는 한에는 추미애가 왜 미끄러졌는지를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층을 뜻하는 개딸들 간에는 누가 추미애를 찍지 않았는지를 밝혀내려는 움직임이 벌써부터 점화됐다고 한다.

 

우원식 또한 추미애 못잖게 친명 색깔이 짙은 인사인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또 한 번의 소위 수박색출 작전은 내로라하는 친이재명 성향 유튜브 방송 채널들의 조회수와 수익금을 늘리려는 목적의 얄팍한 장삿속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필자는 단호하게 평가절하하고 싶다.

 

199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당 계열의 정당에서 확고부동한 주류로 자리 잡으려면 세 번의 중차대한 역사적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만 했다.

 

첫 번째 시험대는 1998년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를 지지했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 시험대는 2002년의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시종일관 응원했느냐는 것이다. 세 번째 시험대는 2003년 가을 무렵부터 시작해 2004년 4월의 17대 총선으로 마무리된 탄핵 정국에서 초지일관 참여정부 편에 서서 노 대통령 탄핵 책동을 반대했느냐는 것이다.

 

이 세 번의 쉽지 않은 검증을 모조리 무사히 통과한 인사들과 그들의 직계세력만이 복잡다단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계통 정당의 주류로 의연히 버티고 있다. 반면, 이 세 차례의 시험에서 단 한 차례라도 답안지에 오답을 써낸 쪽은 골품제 계급 사회였던 신라 말기의 최치원 같은 6두품 출신의 불우한 인재들처럼 출세와 성공에 숙명적 한계가 질곡처럼 따라다녔다.

 

세 번의 시험을 전부 통과한 정치인들의 양대 대표주자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이해찬 전 국무총리이다. 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원만히 관리하는 데 실패해 한동안 낭인 신세로 떠돌기도 했지만, 정동영이 집권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의 공식 대선후보로까지 선출된 것은 그가 전적으로 1998년, 2002년, 2003년~2004년의 시험을 무사통과한 덕분이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세 번의 시험 가운데 첫 번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까닭에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끝내 주역으로 웅비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1998년 대선 정국에서 이회창 총재가 이끌던 한나라당에 몸담았었다.

 

추미애는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새천년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은 올바르지 못한 정치적 기획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확신을 지닌 필자조차 노 대통령 탄핵 소동 당시에는 견결한 노빠의 하나로 탄핵세력과 맞서 싸웠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뜬금없이 과거를 소환하는 연유는 참여정부 탄생의 일등 공신인 추미애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할 사유를 모으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탄핵 대열의 선두에 선 이유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데 있다. 추미애는 그 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노 대통령 탄핵을 사과했다. 손학규와 김부겸이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행동을 나중에 거듭거듭 사과했듯이. 허나 손학규에게도, 김부겸에게도, 추미애에게도 그들의 후회 가득한 순간의 선택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손학규는 민주당 당수까지는 됐다. 대선후보는 되지 못했다. 김부겸은 민주당 정권에서 국무총리까지는 됐다. 실세 총리는 못 됐다. 추미애 역시 민주당 정부 아래에서 여당 대표와 국무위원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러나 결정적 고비에서 최고 권력자의 부름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법무장관 추미애와 검찰총장 윤석열 사이에서 고뇌하고 번민하다가 결국 후자의 손을 마지못해 들어준 것은 집권세력 수뇌부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노 대통령 탄핵의 쓰라린 기억 탓이었으리라.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은 소수의 김대중의 사람들과 다수의 노무현의 사람들이 전자가 후자의 병풍 역할을 하는 형태로 그럭저럭 공존하고 있다. 다수의 노무현의 사람들에게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치에 입문한 대구 태생의 젊은 여성 판사 추미애에 대한 태곳적 기억은 거의 없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한겨울에 희망돼지 모금에 앞장서던 돼지엄마 추미애에 대한 행복하고 낭만적인 기억은 희미하고 어렴풋이 남아 있다. 조순형 대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무현 탄핵의 선봉에 섰던 추미애에 대한 불쾌하고 원망스러운 기억은 아직도 비교적 선명히 남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세 번의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는 실력도 중요했으나 그에 못잖게 운도 중요했다. 손학규도, 김부겸도, 추미애도 운발이 나빴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심도 경기의 일부이듯, 운도 실력의 불가피한 구성요소인걸.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주류로 계속 군림하기란 그만큼 힘겹다는 의미이다. 물론, 세 번의 시험 모두에 깔끔하고 완벽하게 통과하고서도 범털이 되지 못하고 만 인간들도 여의도 정치권에는 부지기수로 흘러넘친다.

 

이제 추미애마저 현실정치의 인물에서 역사 속의 인물로 바야흐로 넘어가고 있다. 민주당이 수많은 정치적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폐쇄적인 순혈주의 정당에서 한 번만 제대로 시험을 통과해도 자신의 역량과 포부를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개방적인 혼종 정당으로 너무 늦기 전에 진화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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