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수서역에서 생긴 일
2024년 2월 8일 목요일 오전, 무척 인상적이면서도 조금은 야릇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약칭 전장련) 대표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서울 강남구에 소재한 SRT 수서역에서 성사된 것이다.
이준석 대표는 박경석 대표가 이끄는 전장련과 그간 날카롭게 대립해왔다. 서울지하철, 그중에서도 4호선 열차의 운행을 집중적으로 가로막으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전장련의 시위 방식에 이준석이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해왔기 때문이다. 4호선은 이준석의 집이 위치한 상계동을 통과하는 노선이기도 하다.
이날은 달랐다. 박경석은 이준석에게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자료를 정중하게 전달했고, 이준석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건네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설날 귀성객들에게 인사하러 나온 개혁신당 주요 당직자들까지 포함된 간단한 차담회를 즉석에서 진행했다. 양향자 개혁신당 원내대표는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제일 먼저 박경석 대표에게 챙겨주는 세심한 배려심을 발휘했다.
평소에는 견원지간처럼 갈등해온 이준석과 박경석이 돌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 상황을 둘러싸고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그러한 분석들 가운데에서는 박경석 대표가 이준석 대표에게 이 대표의 배우자인 배복주 전 정의당 부대표의 거취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려는 차원에서 이 대표를 찾아왔다는 시각이 있었다. 이준석의 호의를 부탁하며 일종의 백기투항을 한 셈이었다. 이준석은 박경석이 어떤 연유와 동기로 수서역까지 왔는지 사전에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루저와 쩌리가 나라를 세운다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가 양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를 이긴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역설한 유명한 명제이다. 이 명제는 마키아벨리의 독창적 선언은 아니다. 마키아벨리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돼 내려온 출처 불명의 교훈을 되풀이해 강조했을 따름이다.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리더십, 즉 영도력의 중요성을 이보다 더 짧고 강렬하게 천명한 발언도 드물 성싶다.
마키아벨리가 언급한 사자의 무리는 기성 질서에서 성공하고 득세한 세력을 뜻한다. 양의 무리는 기존 체제에서 패배하고 도태된 집단을 가리킨다.
우리가 유의할 대목은 무리로서의 사자와 단독자로서의 사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리로서의 사자는 현실 안주를 선호한다. 단독자로서의 사자는 부당하고 모순된 낡은 현실에 타협적으로 적응하느니 차라리 광야로 박차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과 역사의 창조를 지향한다.
선지자이자 예언자인 모세의 위대함은 그가 이집트 안에서의 변화와 혁신을 모색하는 대신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대담하게 홍해를 건넜다는 데 있다. 모세는 체제 내의 개혁가가 아닌 나라 밖의 창업자가 되려는 진로를 선택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당대의 세계제국이었을 이집트에 흔적조차 없이 동화돼 사라지는 비참한 말로를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
흔히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 어렵다는 개혁과 비교해 몇 배는 힘든 게 창업이다. 그러나 성공한 창업의 지속성과 견고함은 성공한 개혁의 수명과 내구성에 견주면 압도적으로 길고 단단한 법이다.
창업과 개혁의 본질적 차이를 잠깐 살펴보겠다. 개혁은 우파적 개념의 창조적 소수가, 좌파적 견지의 혁명적 전위가 그 주력부대가 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잘나고 똑똑한 소수정예만 조직해도 착수할 수 있는 과업이 개혁이다.
창업은 본디 원래 있던 곳을 벗어남을 전제한다. 문제는 출세하고 성공한 주류일 사자의 무리는 그들이 있는 곳을 벗어날 필요성을 좀체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뭔가를 고치고 바꿔야 한다면 남아서 개혁을 하려고 하지, 당장은 척박해 보이는 새 땅에서 새 세상을 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럼 누가 창업가를 분연히 따라나서는가? 본래의 터전에서 패배자와 비주류로 천대받는 소위 루저들이, 잉여와 열외로 괄시당해온 이른바 쩌리들이 창업가 주변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서 하나둘씩 털레털레 모여들기 마련이다.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주된 지지층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남성들로 짐작된다. ‘제3지대’로 불리는 광야로 나선 이준석 주위에 작금에 몰려드는 인물들은 그들 눈높이에서 하나같이 전연 마음에 들지 않을 게다. 왜냐? 이준석은 남아서 개혁하는 길이 아니라 나가서 창업하는 길을 택했고, 광야의 이준석에게 몸을 의탁하려는 인사들은 필자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쩌리와 루저들 일색일 테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심할 대목이 있다. 테세우스를 따라 트로이젠을 떠난 쩌리들이 민주주의의 본향 아테네를 세웠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따라 알바롱가 왕국을 떠난 루저들이 천년제국 로마의 주춧돌을 놓았다. 주몽을 따라서 부여와 이별한 갈데없는 유민들이 고구려를 창건했고, 비유와 온조를 따라서 고구려와 헤어진 권력투쟁의 패잔병들이 백제 건국의 토대를 닦았다.
관건은 이준석 스스로 사자가 되는 것
이준석 대표가 개혁신당이라는 당명 아래 제3지대 여러 정당과 세력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이준석과 함께할 정치인들의 면면을 마키아벨리가 봤다면 그는 필시 ‘한물간 양떼’라 평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늙은 양의 무리를 이끌고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젊고 용맹한 사자가 되라며 이준석을 다그쳤을 것이다. 어째서 저런 쩌리와 루저들과 동반하느냐고 불만 섞인 항의를 할 현재의 대다수 이준석 지지자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반응일 터이다.
화려한 갈색 갈기를 제각기 자랑하는 사자의 무리를 이끌고 전쟁을 벌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기존 질서의 수혜자들인 사자의 무리일수록 오히려 사자의 지휘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다루기 편하고 고분고분한 양을 최고사령관 자리에 앉히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에는 멸망한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을 대한민국 최고존엄의 지위로 밀어 올린 우리나라 보수세력에게 종국에 닥칠 운명일지도 모른다.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한국의 전통적 보수우파 진영이 시나브로 양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가 된 탓이다. 이준석은 양의 군대를 이끄는 사자로 본인이 완벽히 거듭날 때까지 스스로를 더욱더 독하게 연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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