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노무현은 약자를 대변하고 윤석열은 강자를 옹호해
공희준(이하 공) : 이정국 예비후보님께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어느 때쯤부터 함께 활동하셨나요?
이정국(이하 이) : 이재명 대표와 저는 2007년부터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던 해였습니다. 저와 이재명 대표가 정동영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목표로 삼고서 경기도를 거의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던 기억이 여전히 새록새록 합니다.
공 : 그때는 강감찬 장군이나 양규 장군이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져도 승산이 희박한 분위기였습니다. 적대적인 정치 환경에서 두 분이 엄청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 이재명 대표도, 저도 불리한 선거구도 같은 건 애당초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고생했던 일을 계기로 이재명 대표와 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서로 내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민선 성남시장에 당선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전까지는 굉장히 자주 만났었습니다.
공 :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의 이재명 대표는 어떤 성격이었습니까?
이 : 이재명은 한마디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당 신도시를 품고 있는 성남은 민주당에서는 그 누구도 선뜻 선거에 나가려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짓기에 더 좋은 논밭을 찾아가려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이재명은 자신이 현재 발을 딛고 있는 곳을 기름진 옥토로 결국은 성공적으로 개간해냈습니다. 그는 여건을 탓하거나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담대한 개척정신과 불굴의 도전정신이 오늘날의 이재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재명 대표의 그러한 탁월한 장점을 늘 본받으려 노력해왔습니다.
공 : 후보님께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공직 선거에 출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여정부와 윤석열 정부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참에 한번 간략하게 비교해주세요.
이 : 그때는 제가 한창 혈기왕성한 시절이었습니다. 참여정부가 수구기득권 세력의 총공세로 위기로 내몰린 시기이기도 했고요. 역사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는 뜨거울 열정과 절박한 의무감이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며 저는 선거에 나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공 : 출마하려면 돈과 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그와 같은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요?
이 : 돈과 조직부터 먼저 따진다면 나가서는 절대 안 되는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열쇳말을 정치개혁의 화두로 제시했습니다. 다름 아닌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공천’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힘센 정치인을 몰라도, 당내 실력자에게 줄이 닿지 않아도 공당의 후보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많은 정치 신인들에게 불어넣었습니다. 돈 안 드는 정치를 실현해 낡고 썩은 기성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노무현의 의지와 열정이 상향식 공천제도에 진하게 녹아 있었습니다. 그러한 민주적이고 혁신적인 공천 방식 덕분에 저는 경선에서 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공 : 노풍의 진원지가 되었던 광주 국민경선의 감동을 안양에서 재연하신 셈이네요?
이 : 예, 그렇습니다. 저는 노 대통령이 도입해 정착시킨 투명하고 공정한 상향식 공천제도의 모범생이자 수혜자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귀감이고 멘토인 노 대통령을 국회에서 부당하게 탄핵시킨 집단에 맞서서 더 처절하고 전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 : 윤석열 대통령과 영부인 김건희 여사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이 : 윤 대통령이 돌아가신 노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면 지금처럼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나라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삶을 살아온 길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정반대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을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태도가 확고히 체득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서민의 처지에서, 사회적 약자의 눈높이에서 정책을 고민하고 실천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철저하게 그 대척점에 위치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검사로 오랫동안 생활해오며 남들 머리 위에서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는 습성이 뼛속 깊이 체질화됐습니다.
공 : 누구를 만나도 반말부터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분이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이 : 왜냐? 평생 갑으로만 살았던 탓입니다. 강자로만 지내온 때문입니다. 게다가 검사도 보통 검사가 아닙니다. 특수부 검사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강자 중의 강자였습니다. 그러니 윤 대통령이 무슨 수로 서민의 실제 삶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실직자와 영세 자영업자 같은 취약계층들이 진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노무현이 약자의 대변자였다면, 윤석열은 강자의 옹호자입니다.
공 : 민심을 대하는 자세와 감도가 다르기 마련이겠네요?
이 : 윤석열이 노무현처럼 민심에 순응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의 결정과 판단이 민심과 엇갈릴 경우에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 간극을 좁히려고 진정성을 가지고 꾸준히 시도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심을 권력의 힘으로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습니다. 가히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공 : 윤 대통령은 한 사람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건희 여사 단 한 명을.
이 : 저 또한 노무현 대통령처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모로 불민한 탓에 그럴 기회를 아직 잡지 못하고 있는 게 몹시 아쉽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던 내 아버지
공 : 올해 2024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탄생한 지 만으로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후보님께서는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과 고향이 같습니다.
이 : 김대중 대통령도, 저도 전라남도 신안군의 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하의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저는 우이도가 고향입니다. 하의도는 우이도에 있는 산 위에 올라가면 마치 당장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이는 섬입니다.
공 : 하의도와 우이도 가운데 어느 섬 면적이 넓은가요?
이 : 하의도가 더 큽니다. 큰 섬이기 때문에 육지와 연결되는 연도교가 현재는 놓여 있습니다. 우이도는 뭍에서 먼 까닭으로 다리가 건설되지 않고 있습니다.
공 : 후보님께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은 하의도는 물론이고 우이도에서도 존경받고 사랑받는 영웅으로 통했을 것 같습니다.
이 : 김대중 대통령은 하의도 옆 우이도 섬마을 소년 소녀들에게 지금으로 치자면 아이돌 같은 존재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매일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렇게도 좋아하고 지지하던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끝내 보시지 못한 채 1993년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1998년 2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공 : 후보님께서 많이 아쉽고 속상하셨겠네요.
이 :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에서 대통령에 취임하시는 모습을 보고 생전의 아버님 생각이 다시금 났습니다. 아버지께서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신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공 : 어떤 이유인가요?
이 :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바로 우리 동네, 곧 우이도 태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화갑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게 아버님의 철석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아버님 소원대로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자 한화갑 전 의원도 여당 당대표로 선출될 정도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공 : 제가 한화갑 전 대표를 몇 차례 직접 뵌 적이 있는데 그분의 나중의 정치적 선택이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이 : 저도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신 이후의 한화갑 전 대표의 정치적 궤적을 떠올리면 씁쓸하고 착잡합니다.
공 : 김대중 대통령이라면 지금쯤 민주당을 향해 어떻게 조언하셨을까요?
이 : “뭉치고 단결하라!”는 말씀을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하셨을 테지요. 김대중 대통령께서 만약 살아계셨다면 흩어지면 안 된다고 민주당 정치인들과 당원들에게 간곡히 당부하셨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공 : “무조건 단결하고 통합하라”는 메시지였겠네요?
이 :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위대한 정치 지도자이신 것입니다.
공 : 때마침 「길 위에 김대중」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개봉됐습니다. 이정국 후보님께서도 그 영화를 관람하셨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고 어떠한 감동을 받으셨는지요?
이 : ‘감동’이라는 두 글자만 가지고는 감히 평가하고 형용하기 어려운 영화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겪었던 고난과 고초는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가시밭길이었고, 고비마다 죽음의 위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신념과 철학을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길 위에 김대중」은 그분이 왜 인동초로 불렸는지를 생생하고 절절하게 깨우쳐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저 같은 후세대 정치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송구하고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겪는 데서는 그분의 아들들도 열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고 김홍일 의원은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받은 혹독하고 야만적인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에 심각한 지병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해야만 했습니다.
저도 정치를 하면서 썩 편한 삶은 살아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앞에선 저 같은 사람은 감히 ‘고생’이라는 말을 꺼내선 안 됩니다. 국민을 위해 더 낮은 자세로 성실히 봉사하고 치열하게 헌신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언제나 제게 주고 계십니다. (③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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