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동에는 순사가 있다
동장군이 남기고 간 겨울의 흔적이 여전히 도처에서 묻어나는 차갑고 쌀쌀한 초봄 무렵이었다. 나는 지인을 만나러 서울 지하철 7호선 상봉역에서 전동차를 하차했더랬다. 평소의 게으른 성격과는 다르게 그날따라 체질에 맞지 않는 부지런을 떤 덕분인지 약속장소인 상봉역 밖에 너무나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가까운 찻집에라도 들어가 있자니 커피값이 아까웠다. 사실은 없었다. 불가피하게 역 바로 바깥에 위치한 작은 근린공원에서 여분의 시간을 때우게 됐다.
그런데 좀 노는 애들로 보이는 10대 후반의 청소년들 일고여덟 명이 무리를 지어 공원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요란하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공원을 지나가는 젊은 여성들을 향해 음탕한 시선을 던지며 성희롱적인 수작을 걸어대기도 했다.
가서 잔소리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야말로 중과부적이라 공원 한쪽 구석에서 인상을 쓰는 게 내가 구현할 수 있는 정의의 전부였다. 경찰에 신고하자니 그러면 지인과의 약속에 차질이 빚어질 게 명백한 까닭에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흐르자 누군가 112에 제보를 했는지 드디어 경찰이 출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두 번 놀랐다. 불량청소년들이 백주대낮의 공공장소에서 범죄적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음에도 경찰이 30분이나 경과하고서야 늑장 출동한 사실에 한 번 놀랐고, 출동한 경찰이 겨우 1명이며 그조차 옛날 일제강점기 시절의 순사처럼 자전거를 끌고 온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동네 중국집 배달원은 서울 강북 변두리 동네의 경찰과 비교하면 어벤저스급의 신속한 기동력을 확보해놓은 셈이었다.
엽기적인 7호선
어지간한 사건사고에서 비롯되는 피해들을 예방 또는 최소화하는 중요한 작업은 30분 훨씬 안쪽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사건사고 발생 후 30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초동단계의 대응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면 골든타임은 이미 헛되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비행청소년들이 지하철과 맞닿은 근린공원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지팡이는 30분이 돼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도 홀로 자전거 타고서.
이명박 정권 출범 초기에 생생하게 목격한 풍경인 터라 꽤 오래된 일화일지도 모른다. 허나 필자는 이 씁쓸한 경험담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되풀이해 소개해왔다. 이후로도 남한사회가 근본적으로, 구조적으로 바뀐 건 실질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강남과 강북 간의 불평등은, 범위를 확장하면 수도권과 나머지 지역 사이의 격차는 단순히 정치경제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치안과 안전, 보건과 의료 등의 기초적인 사회적 생존조건에서도 두드러지게 확 드러난다.
단적으로 가정해보자. 동일한 서울지하철 7호선 연변이되 강북의 대표적인 서민층 주거지역에 설치된 상봉역이 아닌 부유하고 번화한 강남 한복판의 학동역과 인접한 공간에서 불량청소년들이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어도 경찰이 30분이 지나서야 자전거 타고 나타났겠는가? 그것도 혼자서.
역시나 지하철 7호선이 통과하는 남구로역 출입구 바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담배를 피워댄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하는 필자 같은 비흡연자들로서는 엄청난 고역이다. 그러나 지하철 입구 근처에서는 흡연하지 말라며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출신의 험상궂게 생긴 이주 노동자들이 만약에 7호선 강남구청역 앞에서 담배연기를 푹푹 뿜어대도 남구로역처럼 제지하는 경찰관이나 공무원이 없었을까? 장담하건대 관청의 단속에 더해서 부근에 거주할 ‘8학군 기자’들에 의해 언론에서 이미 대대적으로 공론화가 되었으리라.
니가 가라, 남구로에
참여정부의 청와대 국정홍보수석비서관으로 재임하던 한 이화여대 교수는 “대통령은 21세기에 사는데 국민은 19세기에 살고 있다”는 식으로 권력자는 띄워주고 인민은 능멸하는 망언을 발설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21세기 남한사회의 불의하고 불평등한 총체적 실태는 이 여성 교수의 문제적 발언을 약간만 각색해보면 여지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기 마련이다.
“국민은 상봉동에 사는데, 사회지도층은 청담동에 살고 있다.”
대다수 평범한 국민이 발을 딛고 선 현실은 상봉동의 현실이고 남구로의 현실이다. 반면에,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출세하고 성공한 엘리트들이 대면하는 일상적 현실은 오직 청담동과 논현동의 현실일 따름이다. 더욱이 청담동의 현실을 남구로의 현실로 알고, 논현동의 현실을 상봉동의 현실이라 믿는 출세하고 성공한 엘리트들이 속한 진영과 정파는 보수와 진보를,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게다가 요즘에는 출세하고 성공한 연예인들도 죄다 강남에 몰려 산다. 자신은 강남의 넓고 호사스러운 고급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으면서 남구로역 근처에는 아예 와보지도 않았을 어느 유명 남자 배우의 예멘 난민 수용 제안에 필자 같은 사람들이 대뜸 욕 반, 비웃음 반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연유이다. 불우한 외국인들을 그토록 열렬히 포용하기 바란다면 본인이 빨리 남구로로 이사를 오든가…. 네가 살아봐라 남구로에!
한데 듣자니 난민들 껴안자는 멋진 말씀을 해주신 해당 유명 남자 배우는 얼마 전 미모의 재벌 2세도 끼어 있는 일행과 함께 홍콩으로 여행을 갔다더라.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려는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 부부의 내로남불은 유명 연예인들의 내로남불에 견주면 귀엽고 앙증맞은 애교 수준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누가 한국을 지옥으로 만들었는가
엘리트들의 무능함은 그들의 악의와 독기가 아닌 무지와 착각에서 발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유라의 입시부정으로부터 난민문제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에서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인간들이 좌우를 나누지 않고, 진보와 보수를 망라해, 국가와 시민사회를 아우르며 연일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잠꼬대처럼 해대는 궁극적 원인은 그들이 자신들만의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생활영역에서 과도하게 오랫동안 특권적으로 귀족스럽게 잘 먹고 잘살아온 점에 있다.
범죄의 징후만 포착되어도 공권력의 일원인 경찰관은 물론이고 ‘민영경찰’이라고 일컬어질 세콤 직원들까지 순식간에 출동하는 부자동네에 살고 있는 처지라면 나도 흉악범에 대한 사랑과 관용을 눈물콧물 흘리며 자랑삼아 호소할 수 있다. 못사는 나라에서 한국에 돈 벌러 들어온 불쌍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오직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이라면 나도 “난민 무조건 전원 망명 허용”을 통 크게 주장할 수가 있다. 난민들이 내가 수시로 지나가는 길가에서 담배 연기 뻑뻑 내뿜는 꼴불견 사태는 절대 없을 테니까.
세상을 지옥으로 이끄는 자들은 딱 두 종류다. 실제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과, 입으로만 좋은 일을 하는 자들. 자유한국당이 실제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이 모여 있는 정당이라면, 더불어민주당은 입으로만 좋은 일을 하는 자들이 모여 있는 정당이다. 최근의 추이와 동태를 관찰하면 이제는 더불어민주당도 실제로 나쁜 일을 하는 데까지 손을 뻗친 듯싶으나…. 자유한국당이 그나마 최소한 내로남불 비판은 듣지 않는 비장의 이유일 터이다.
그래서 묻겠다. 힘없고 가난한 인민계급의 여자와 노인과 아이들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경상남도 진주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 기사가 운전하는 관용차 뒷자리에 탑승해 쾌적한 사무실로 편안히 출근하는 내로라하는 고위공직자들이 여럿 살고 있었다면 나중에 흉악한 연쇄살인 범죄를 저지를 자가 조현병 환자임을 구실로 그 아파트 단지에 감히 거주할 엄두를 냈겠는가?
몸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 앞에는 입으로만 선행을 베푸는 자들이 언제나 있는 법이다. 사형제 폐지를 외치는 자들이 있기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만 골라 지능적으로 해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진주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그리고 이번 사건과 관련해 자비니, 용서니 하는 재수 없고 위선적인 꼴값 떠는 같잖은 객소리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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