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대구광역시장이 습관처럼 돼버린 글삭튀를 다시금 감행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글삭튀’는 “글을 삭제하고 튄다”의 준말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포함한 각종 온라인공간에서 자신이 올렸던 글이 물의를 빚을 경우 게시물을 조용히 삭제하는 행위를 뜻한다.
일회성으로 끝나면 우발적이고 충동적 행위이지만, 되풀이해 저지르면 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의도적 소행으로 간주될 수가 있다. 필자가 최근 들어 그 빈도가 부쩍 더 잦아진 홍 시장의 글삭튀를 홍준표 나름의 고도의 노련한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해석하는 까닭이다.
과하지욕(胯下之辱), 홍준표가 어제 SNS 계정에 올렸다가 얼마 후 급하게 지운 고사성어이다. 풀이하자면, 타자의 가랑이 밑을 기어서 지나가는 치욕을 의미한다. 중국 고대의 장군이자 병법가인 한신이 이름 없는 젊은 백수로 지내던 시절에 마을의 불량배들과 맞닥뜨리자 싸우는 대신 왕초쯤 되는 자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얌전히 기어 통과함으로써 시비를 피한 일에서 ‘과하지욕’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홍준표 시장은 지금쯤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억지로 누르고 있을지 모른다. 홍 시장이 전국 곳곳이 물폭탄을 맞아 심각한 수해로 신음하는 가운데 ‘우중 골프’를 강행한 것과 관련해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의 중앙윤리위원회가 그에 대한 징계절차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홍준표 시장이 억울한 심정에 놓인 것은 소속 정당에서 제재를 당할 위기에 처해서만은 아니리라. 용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지도부가 형평성을 잃어도 너무나 단단히 잃은 탓이다.
홍준표가 수많은 이들이 물난리로 고통받는 와중에 국민정서에 어긋나게 골프장에 간 것은 맞다. 그런데 실제로 심각한 홍수 피해가 발생한 충북과 충남의 지방행정 최고책임자, 즉 도지사들에게 여권 수뇌부는 여태껏 특별한 질책이나 책임추궁을 한 바가 없다.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친박에서 친윤으로 환승한 인물이고, 김영환 충북지사가 윤핵관을 자처해온 인사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면 필자가 과도한 정파적 사고에 오염된 것일까? 똑같은 잘못을 범해도 윤 대통령과 먼 사람에게는 가혹하게 철퇴를 내리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형식적인 솜방망이 처분을 내린 게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정부여당의 일상적 모습이었다.
윤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이 자행해온 불공정하고 무원칙한 내로남불 행태들을 비판하는 건 이제 쇠귀에 경 읽기가 된 터이다. 치열하고 중차대한 외교전이 전개되는 뒤편에서 태연히 명품 쇼핑에 나서는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안하무인 행각은 현 정권에 걸었던 마지막 희망과 기대감마저 무참하게 짓밟기에 충분했다. 김 여사의 모친 최은순 씨가 은행잔고 증명서를 불법적으로 위조한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는 뉴스 속보는 최 씨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까지 덩달아 부끄럽고 아연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장모가 파렴치한 경제사범으로 단죄되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홍준표는 냉장고에서 갓 꺼내 뚜껑을 딴 콜라처럼 시원하고 톡 쏘는 화법으로 지지를 모으고 인기를 끌었다. 과거의 홍준표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처사다 싶으면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 엑소(EXO)의 노래제목 같이 주저하지 않고 사납게 으르렁으르렁 댔다. 현재의 홍준표는 어떤가? 으르렁으르렁하던 당돌한 기백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소심한 새가슴이 되어 뒤에서 혼자 구시렁구시렁거리기 일쑤다. 홍준표의 상습적 글삭튀는 간 보기의 생활화와 눈치 보기의 체질화가 불러온 불미스럽고 볼썽사나운 결과물이리라.
홍준표는 한신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작은 굴욕을 참았다고 믿는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경로 의존성의 법칙이란 게 있다. 이를테면 한번 음주운전을 한 인간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거듭해서 만취한 상태로 자동차 운전대를 잡기 마련이다. 음주운전 범죄자의 재범률이 유달리 높은 배경이다.
마찬가지다. 홍준표가 자기를 한신에 빗댔다면 불량배 역할은 맥락상 당연히 윤석열 대통령 몫이다. 홍준표는 당장의 수모를 견뎌야 나중에 장차 큰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계산한 성싶다.
홍 시장에게는 미안한 얘기겠으나 일단 한번 남의 가랑이를 기기 시작하면 그 후로도 계속 쭉 기게 되는 법이다. 안철수 의원이 어째서 철수정치의 오명을 뒤집어썼겠는가? 2011년 가을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면에서 박원순 당시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에게 단일화를 구실로 후보 자리를 양보한 결정이 중요한 고비마다 늘 ‘기승전철수’로 마무리되곤 하는 철수정치의 경로 의존성을 구축하는 시발점으로 작용한 연유에서였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던 한신은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과 더불어 천하삼분지계를 도모할 것을 조언한 책사 괴철의 건의를 무시하고 유방의 가랑이 사이를 기는 안전하면서도 소극적인 선택에 만족했다. 유방의 가랑이 사이를 긴 한신을 기다린 운명은 토사구팽을 당하는 비극적 말로였다.
홍준표는 과하지욕이라는 어려운 사자성어까지 동원해가며 그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무릎 꿇은 걸 합리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방금 한신의 사례를 들어 상기시키지 않았던가? 한번 남의 가랑이 아래를 기면 이후에도 쭉 기게 된다고…. 홍준표는 오늘은 윤석열의 가랑이 사이를 기지만, 경로 의존성의 법칙에 근거하면 내일은 한동훈의 가랑이 사이를, 모레는 원희룡의 가랑이 사이를, 사흘 뒤인 글피에는 오세훈의 가랑이 사이를 기게 될 개연성이 높다.
게다가 가랑이 사이를 기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홍준표를 거칠게 윽박지를 야심가와 실력자가 단지 이 셋이겠는가? 유승민도 있고, 안철수도 있으며, 홍 시장에게는 아들뻘인 한참 나이 어린 이준석도 물론 있다. 그러니 홍준표 대구시장은 길고 우여곡절 많았던 정치인생을 남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다가 허무하게 마감하기 싫거들랑 사나이답게 한번 써놓은 글은 삭튀하지 말고 영구보존하시기 바란다. 낙장불입에 남아일언중천금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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