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pan class="fr-img-caption fr-fic fr-dii fr-fil" style="width: 300px;"><span class="fr-img-wrap"><img src="/data/cheditor4/2009/fdd14f7d80d1d59fcb110be5b314e24ddc1ed6ba.jpg"><span class="fr-inner">알키비아데스의 후원자인 티사페르네스는 본인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기꺼이 반전 있는 남자가 됐다. 이미지는 싸이의 뮤직비디오</span></span></span>스파르타에 시종일관 굴종적인 자세를 고집한 과두제적 귀족정은 아테네 민중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쳐 얼마 못가 와해되고 말았다. 알키비아데스의 추종자들이 민주파로 정치적 노선을 수정한 일은 귀족정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민중은 알키비아데스가 조속히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권력의 불안한 공백을 메워주기를 바랐다.</p><p> </p><p>알키비아데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어렵게 찾아온 금의환향의 기회를 마다한 이유는 민초들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존재인지를 쓰라리고 뼈저리게 체험해온 데 있었다. 개체로서의 민중은 의리 있는 사람일지 몰라도, 집단적 단위로서의 인민대중은 끔찍할 만큼 이기적이면서도 기회주의적이었다.</p><p> </p><p>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 안겨줄 확실한 선물보따리만이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오가는 민중의 변덕과 배신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 독보적인 안전장치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민중 사이에 확실한 연결고리가 되어줄 사냥감을 찾아 사모스 섬을 떠났다. 그는 더 이상 단기필마가 아니었다. 수중에 18척의 대형 삼단노선을 거느린, 신라 말기에 청해진을 건설한 장보고를 연상시키는 만만찮은 해상군벌로 몸집을 불린 입장이었다.</p><p> </p><p>사모스를 출항한 알키비아데스의 소함대(Flotilla)는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스파르타 함대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배들이 헬레스폰토스 해협 방면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즉각 180도 변침해 라케다이몬의 함선들을 추격하는 데 나섰다.</p><p> </p><p>알키비아데스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도착했을 무렵, 아테네 군선들과 스파르타 전함들은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 함대의 느닷없는 출현에 스파르타 장병들은 환호했고, 아테네의 수병들은 경악했다. 그들 모두는 알키비아데스가 당연히 스파르타에 가담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다.</p><p><br></p><p>그러므로 알키비아데스가 승선한 기함에 돌연 아테네 깃발이 게양되자 스파르타인들이 느낀 충격과 공포의 강도는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아테네인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로써 해전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델로스 동맹이 노획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의 군함 숫자만 서른 척에 달했다. 배를 버리고 뭍으로 달아난 스파르타 장졸들은 페르시아의 맹장 파르나바조스의 도움과 분투에 힘입어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p><p> </p><p>알키비아데스는 해전이 벌어진 바다 근처에 동포들과 공동으로 승전비를 세운 다음 곧장 페르시아 영토로 달려갔다. 은인인 티사페르네스와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p><p> </p><p>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에서 당한 불의의 봉변을 두고 “반전으로 흥한 자, 반전으로 망한다”고 표현하면 아마 어울리지 않을까? 티사페르네스는 가수 싸이가 부른 전 세계적 히트곡인 「강남 스타일」의 가사에 등장하는 반전 있는 여자 못잖은 반전 있는 남자였다.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로 누누이 칭송해온 페르시아 태수는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는커녕, 포상과 치하를 잔뜩 기대하고 왔을 아테네의 망명객을 되레 옥에 감금했다.</p><p> </p><p>이제껏 알키비아데스의 뒤를 꾸준히 봐주었던 티사페르네스는 왜 갑자기 낯빛을 바꾸어 표변한 것일까? 천하의 알키비아데스도 그리운 고향으로 드디어 돌아간다는 생각에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성싶다.</p><p><br></p><p>그가 스파르타군의 허를 찌를 계획을 짜는 일에 몰두하는 사이에 국제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티사페르네스가 공식적 우방국가인 라케다이몬을 따돌리고 사사건건 공공연히 아테네를 비호하는 사태에 분격한 스파르타 정부가 페르시아 국왕에게 직접 불만을 토로했고, 상부로부터의 문책이 두려워진 알키비아데스의 페르시아인 후원자는 변심한 애인처럼 그새 마음을 바꿔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을 편들기로 작정한 터였다. 이러한 급박한 정세변화를 까맣게 몰랐던 알키비아데스만 그에게 헬레스폰토스의 물길에서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스파르타 함대의 꼴이 영락없이 돼버렸다.</p><p> </p><p>허나 이쯤에서 힘없이 주저앉을 알키비아데스가 아니었다. 한 달 가량을 억류상태에 놓여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보초병의 감시의 눈길이 소홀해진 틈을 이용해 구금된 장소에서 탈출했다. 그가 감시를 책임진 간수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썼을 가능성이 컸음은 물론이다. 돈은 또 벌면 되었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하면서 티사페르네스에게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그는 페르시아 태수가 일부러 감시를 느슨하게 해준 덕분에 무사히 탈옥할 수가 있었다고 가는 곳들마다 떠벌렸던 것이다.</p><p> </p><p>이윽고 아테네군의 진영에 당도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군을 육지와 해상 양방향에서 강타해야만 승산이 있음을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두루 역설했다. 성공적 기습의 생명은 철저한 보안 관리와 기밀 유지에 있었다. 그는 헬레스폰토스에 재집결한 스파르타 함대를 분쇄하러 항진하는 도중에 조우한 다양한 선적의 상선들을 예외 없이 모조리 나포했다.</p><p><br></p><p>알키비아데스는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내리치며 거센 소나기가 퍼붓는 시점을 공격개시 순간으로 선택해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는 기습작전의 초반에 의도적으로 함대의 일부만을 동원했다. 키지코스 항구에 주둔한 스파르타 함대가 아테네의 군세를 얕보게끔 유도하려는 노림수였다. 그의 계산대로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움직여주자 그는 나머지 아군 선박들을 전부 출격시켜 스파르타 전선들을 포위해 차례차례 격침해나갔다. 아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약하게 보이도록 연출해 적을 방심시켜 특정한 지점으로 상대방을 유인해내는 기만책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왜군 함대를 격멸할 때 사용한 책략이기도 했다.</p><p><br></p><p>아테네군은 이번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면서, 스파르타의 유능한 장군 가운데 한 명인 민다로스를 전사시켰다. 페르시아군의 친스파르타파 지휘관인 파르나바조스는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찼던 탓이다. 적의 해군과 육군을 통쾌하게 궤멸시킨 아테네군은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게 된 키지코스 섬을 습격해 그곳에 머물러온 스파르타인들을 전원 살해했다. 이즈음 싸움의 양상은 적국 사람들을 포로로 잡지조차 않고 현장에서 잔혹하게 즉결처분하는 야만적이고 반문명적인 절멸전쟁의 양태로 완전히 변모해 있었다.</p><p> </p><p>아테네 측의 완벽한 승리였다. 전투의 결과로 아테네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수역인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제해권을 다시금 장악했다. 스파르타군은 본국에 긴급하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마저 적군에게 잡혀 죽는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전령이 휴대한 전황보고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후세에 전하고 있다.</p><p> </p><p>“함대 전멸함. 민다로스 장군은 혼전 중에 전사. 식량마저 떨어진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절망적인 위기상황임.”</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