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pan class="fr-img-caption fr-fic fr-dii fr-fir" style="width: 323px;"><span class="fr-img-wrap"><img src="/data/cheditor4/2009/33daf87634196778c8b1b61e18fa12592b52b51e.jpg"><span class="fr-inner">알키비아데스는 춘추전국시대의 명장 오기처럼 그가 두각을 나타낸 곳들마다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직면해야만 했다. (이미지 출처 : 구글)</span></span></span>알키비아데스가 현란한 변신을 거듭한 근본적 목적은 카멜레온이 수시로 피부의 색깔을 변화시키는 것과 매한가지로 생존, 즉 생명연장에 있었다. 단지 차이 나는 부분이 있다면 카멜레온이 천적의 눈을 피하려고 색을 바꾼다면, 알키비아데스는 주변의 불신을 피하기 위해 행태를 변화시킨다는 점이었다.</p><p> </p><p>카멜레온이 어떤 보호색을 띠어도 본질은 도마뱀이듯, 알키비아데스가 어떠한 행동방식을 선택해도 결국에는 야심가 알키비아데스였다.</p><p> </p><p>스파르타의 아기스 왕은 강력한 지진이 왕국을 엄습한 이후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지 않고자 왕비인 티마이아와의 잠자리를 자제해오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내와 동침한 지는 열 달이 훌쩍 넘었더랬다. 그런데 왕비가 아들을 덜컥 출산했다. 그새 알키비아데스와 통정한 탓이었다.</p><p> </p><p>항복한 적장이 목숨을 의탁한 나라의 왕비를 임신시킨 사건은 목이 열 개라도 수습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이곳은 스파르타였다. 설령 불륜으로 태어난 아기일지언정 미래에 용감한 전사로 장성할 수 있는 건강한 사내아이라면 무조건 대환영하는 군국주의의 본산이었다.</p><p> </p><p>알키비아데스는 왕비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핏줄임을 대놓고 자랑하며 라케다이몬의 왕좌에 그의 아들이 앉는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상상했다. 티마이아는 한술 더 떴다. 왕비는 레온티키데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 아이를 사석에서는 알키비아데스라고 불렀다.</p><p> </p><p>아기스는 간통을 저지른 배우자와 불륜의 상대방을 통 크게 용서하는 대인배의 면모를 일단은 과시했다. 그렇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자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물러터진 호구까지는 아니었다. 알키비아데스와 티마이아의 부도덕한 불장난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아들은 스파르타의 최고존엄으로 등극하지 못했다.</p><p> </p><p>감독이자 주장인 알키비아데스를 잃어버린 시칠리아의 아테네 원정군은 세간의 예상처럼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아테네 군사력의 중핵이 시칠리아에서 결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이제껏 아테네의 지배권 아래 마지못해 잔류해온 에게 해 동쪽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일제히 스파르타로 말을 갈아탔다. 스파르타는 새롭게 동맹관계를 체결한 이들 나라들 가운데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제일 먼저 키오스에 대규모 군사원조를 제공했다.</p><p> </p><p>답답한 육지를 벗어나 오랜만에 넓고 푸른 바다로 나온 알키비아데스는 가히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해전에 서투른 스파르타 군대를 직접 진두지휘해 이오니아 지역의 대부분을 라케다이몬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시켰다.</p><p> </p><p>낯선 외부인의 명성이 높아지면 전통적인 토착세력의 질투와 시기심도 그에 정비례해 커지는 법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 출신 명장 오기도 그가 추진한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조치에 반발한 초나라 귀족계급의 반격으로 인해 온몸에 화살이 박힌 고슴도치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절명해야만 했다.</p><p> </p><p>알키비아데스에게 전해지는 스파르타 인민들의 사랑과 애정은 추상적이었다. 이와 반대로 그를 향해 맺힌 스파르타 기득권층의 증오와 원한은 구체적이었다. 더욱이 아기스 왕은 알키비아데스에게 확실하게 정산해야만 할 청구서가 있었다.</p><p> </p><p>스파르타 정부는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전장의 장수들에게 내렸다. 이를 눈치 챈 알키비아데스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짐짓 태평스럽게 지내다가 야반도주에 필요한 제반준비를 완료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파르타 군영을 탈출했다. 그가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뿐이었다. 그는 소아시아 지방을 통치하는 태수로 있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오랜 망명생활로 심신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고단한 몸을 맡겼다.</p><p> </p><p>티사페르네스는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최전방의 접적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이었다. 그러므로 아테네이건 스파르타이건 상관없이 그리스 전체를 현존하거나 또는 잠재적인 주적으로 간주해온 인물이었다.</p><p> </p><p>그럼에도 티사페르네스 역시 알키비아데스의 매력과 능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알키비아데스가 지닌 이용가치를 제대로 파악했다. 티사페르네스는 그가 관할한 지역에서 제일 경관이 아름답고 시설이 쾌적한 공원의 명칭을 ‘알키비아데스 파크’로 개명할 만큼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투박한 스파르타식 습속을 이내 버리고 점잖 빼고 무게 잡는 페르시아의 예법을 꼼꼼하게 실천함으로써 그의 세 번째 조국이 흔쾌히 베풀어준 은혜와 보살핌에 성실히 화답했다.</p><p> </p><p>알키비아데스는 그를 박해한 나라들에 무자비하게 앙갚음을 해왔다. 이번에는 스파르타가 알키비아데스에게 참교육을 당할 차례였다. 그가 귀순하기 전까지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후자로 경사된 외교노선을 견지해왔다.</p><p> </p><p>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 대한 기존의 적대시 정책을 완화할 것을 티사페르네스에게 진언했다. 아테네가 원기를 회복해 스파르타와 다시금 대등한 구도의 싸움을 벌여야 페르시아 입장에서 확실하게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다는 셈법이었다. 여기에는 개인적 계산도 적잖이 작용했다. 아테네가 그에게 내린 처형판결은 벌써 유야무야된 지 오래였지만, 스파르타가 집행하려는 사형선고장은 아직도 따끈따끈했기 때문이다.</p><p> </p><p>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에서 도피처를 안정적으로 마련했을 당시에 아테네 함대의 주력은 사모스 섬에 정박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식민지인 사모스 또한 귀족파와 민중파의 대립으로 골치를 앓아왔다. 알키비아데스는 민중파로 출발했으되, 악당들에게 선동당한 대중의 미움을 받아 조국에서 쫓겨나는 씁쓸한 경험을 계기로 귀족파로 자연스럽게 정치노선을 변경한 터였다.</p><p> </p><p>사모스의 아테네군은 150척의 대형 삼단노선으로 편성된 페르시아와 페니키아의 연합함대가 언제 침입해올지 몰라 항시 좌불안석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사모스 섬의 귀족파 지도자들에게 밀서를 보내 페르시아 측과의 화친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를 권유했다. 그는 자기가 양국 간의 데탕트를 촉진시키는 중재자가 되겠다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사모스 섬의 귀족파가 민중파를 단호히 제압할 것을 요구했다.</p><p> </p><p>프리니코스는 알키비아데스와의 위험하고 불온한 거래를 즉각 중단할 것을 귀족파 장군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주장했다. 알키비아데스가 귀족파와 민중파를 대결시키는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한다고 판단한 그는 본인도 이중플레이를 하기로 작정하고는 적국인 스파르타의 해군 사령관인 아스티오코스에게 남몰래 서찰을 띄워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인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을 이간질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고자질했다.</p><p> </p><p>제 딴에는 교묘하게 머리를 굴렸다고 꽤나 자부했을 프리니코스가 미처 입수하지 못한 한 가지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아스티오코스가 티사페르네스의 끄나풀인 것만도 모자라 알키비아데스와도 은밀히 내통해왔다는 사실이었다.</p><p><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