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은 여성가족부
진선미 장관의 여성가족부(약칭 여성부)가 걸그룹의 외모를 통제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에 대한민국 인터넷 세계가 발칵 뒤집혀졌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장발족 단속과 미니스커트 규제가 연상된다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다.
부처 창설 초기부터 해체론 또는 무용론에 직면해온 여성부가 어떠한 의도와 속셈으로 한류와 케이팝 열풍의 견인차인 대중음악 영역에까지 검열의 가위손을 무리하게 들이밀기에 이르렀는지는 아직까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공개성의 측면에서는 문재인 정부 역시 이전의 박근혜 정부 버금가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모습을 드러내온 터라 여성부가 일으킨 이번 걸그룹 외모 통제 소동의 전말과 진실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매우 크다.
필자는 여성가족부의 시대착오적이다 못해 아예 원시적인 정책 방침을 접하고서 엉뚱하게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관련된 어느 웃기고도 슬픈 일화가 떠올랐다.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패배해 분루를 삼켰던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하게 된다. 그런데 총재로 돌아온 그의 복귀 일성이 한나라당 당직자들을 그야말로 멘붕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회창으로부터 정권 탈환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구체적 비전을 들을 것으로 잔뜩 기대한 중앙당 당직자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의 입에서 맨 처음으로 나왔던 정치적 화두가 바로 이런 칙칙한 잔소리 아닌 잔소리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당사 복도에서 좌측통행 하시오.”
필자에게는 이회창 전 총재가 실제로 그와 같은 꼰대소리를 발설했는지 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이회창은 담대하고 진취적인 혁신적 리더십이 아니라, 사소하고 지엽적인 꼰대 리더십(?)으로 덩치 큰 한 정당을 통솔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진보꼰대들의 놀이터
이회창의 사소하고 지엽적인 꼰대 리더십은 국회의원 총선거와 지방선거처럼 가두리 양식장 수준의 선거에서는 일정 정도 약발이 통했다. 그러나 선거의 규모와 차원이 바다처럼 넓어지는 대통령 선거에서는 치명적 한계와 취약성을 노출하고 말았다.
이회창은 이후 한 차례 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그의 세 번째 대권 도전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두 번째 NBA 복귀와 마찬가지로 ‘리그’의 전체적 판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별책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무늬만 소통인 ‘쇼통’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적 여론이 도처에서 빗발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올해로 벌써 햇수로 3년째에 접어든다. 그렇지만 대다수 일반 국민들이 간절하게 염원해온 거대한 역사적 전환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개헌은 사실상 불발됐으며, 선거법 개혁은 허공을 맴돈다. 공공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공무원들의 철밥통은 오히려 더 크고 단단해졌으며, 정부여당 인사들이 앞장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만남을 요청한 데서 증명되듯이 재벌개혁도 진즉에 물 건너간 분위기이다. 바뀐 풍경이라고는 공중파에 얼굴 내밀던 자들이 유튜브로 밀려나고, 팟캐스트 진행하던 자들이 공중파 방송에서 제각기 한 자리씩 꿰찼다는 것뿐이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거대하고 근본적인 목표를 포기하면 그 반대급부로 자잘한 일들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다. 때로는, 사람과 집단이 지질한 사안들에만 집중하는 광경에서 본질적인 목적 달성의 실패가 뚜렷이 예견되기도 한다.
외모에 칼질하는 것은 성형외과 의사들의 몫이다. 여가부의 뜬금없는 걸그룹 외모 통제 시도는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과 같은 문재인 정권의 실세 정치인들이 한가하게 쇼 프로그램이나 들여다보고 있다는 역설적 반증일 수도 있겠다. 왜 한가하냐? 거대한 역사적 전환을 단념했으니 한가할 수밖에 없다.
도발적인 외모의 다양성을 좇는 시청자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기면 된다. 뇌쇄적인 외모의 획일성을 중시하는 시청자들은 쇼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하면 된다. 다양성과 획일성이 나란히 공존하는 게 진짜 다양성이다. 다양성만 가득하거나, 획일성만 군림하는 현상 자체가 구제불능의 획일성인 이유에서이다.
강남 사는 여성만 여성인가
현역 정치인 이회창은 나름 관용과 유연성을 발휘했다. 그는 서민 행보를 위해 흙 묻은 오이 먹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회창 체제의 한나라당에서는 5‧18 북한군 개입설 등의 얼토당토않은 망언은 비공식적 술자리에서나 은밀히 귀엣말로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과 이회창의 한나라당 중간에 샛강이 흘렀다면, 이회창의 한나라랑과 김진태 부류의 자유한국당 사이에는 한강도 아닌 태평양이 떡하니 놓여 있다.
나는 진선미 장관에게 국가의 근본적 개혁을 이루라고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겠다. 이건 진선미 개인의 능력의 한계 탓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전반의 실력 부족의 문제다.
대신에 진선미 장관은 이회창 전 총재를 벤치마킹해 유연성이라도 좀 발휘해주시길 바란다.
저기 신촌에 위치한 특정여대 출신의 스펙 짱짱한 엘리트 여성들이 장악한 여성가족부 관료들만 만나지 말고, 남편과 번갈아 편의점 지키는 평범한 자영업자의 부인도 만나보시라. 판검사의 50퍼센트를 여성들에게 할당하라는 강남 부잣집 딸내미들의 배부른 민원만 수렴하지 말고, 유치원은 물론이고 어린이집마저도 인터넷으로만 신청을 접수하는 과도한 디지털 시대에 좌절한 강북 변두리 동네 컴맹 할머니들의 애로도 이왕이면 청취해보시라.
여성가족부가 여성만 위해서 동분서주하기에 욕을 먹는 게 아니다. 돈 많은 부잣집 사모님들의 인정욕구와 스펙 짱짱한 강남 여학생들의 출세욕망만 대변하는 까닭에 국민들로부터 허구한 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연예계 데뷔는 가난한 서민집안의 딸들에게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잔존해 있는 몇 안 되는 코리안 드림 실현의 수단이고 통로이다. 이 마지막 남은 성공과 희망의 사다리마저 모질게 끊어놓는 게 진선미 장관과 이른바 여성가족부가 생각하는 적폐청산이라면 차라리 파리도 새이고, 바퀴벌레도 자동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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