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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김대중보다도 위대한가 -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과 얼떨결에 대통령 윤석열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2-09-26 20: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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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로비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윤석열 정권의 몰락은 사람과 동물을 통틀어 정권 구성원들 중 오직 토리만이 사과를 할 수 있는 생명체라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사진은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이른바 개사과 모습)

“최근 몇몇 사건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크게 끼쳐드린 것에 사과드립니다. 이를 큰 교훈으로 삼아 더 한층 국민 뜻에 부응한 국정운영을 해나갈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버티는 게 능사, 곧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오만과 독선이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여의도 정치권 전체에 팽배한 지금 풍토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솔직담백한 대국민 사과이다. 국민을 향한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불려도 과언이 아닐 이러한 사과를 강행한 인물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필자가 위에서 소개한 대국민 사과가 김 전 대통령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발표된 시점은 1999년 6월 하순 무렵이었다. 이른바 옷로비 사건이 민심에 충격과 분노를 일으킨 때였다.


옷로비 사건이 무엇일까? 당시 외화밀반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의 아내 이형자 씨가 김대중 정부 고관대작들 부인의 옷값을 대납해주는 방법으로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는 의혹이 불거진 일이었다. 이형자 씨가 옷값을 대신 계산해준 것으로 의심된 여성들 가운데에는 김태정 검찰총장의 배우자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의 사건은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며 우리나라에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결말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특검까지 총동원돼 사건 관계자들을 샅샅이 수사한 결과 로비 시도는 실패한 걸로 판명되었다. 옷값을 부정하게 챙긴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당력을 기울여 야심차게 밀어붙여 성사시킨 국회 청문회에서 밝혀낸 진실이라고는 현재는 고인이 된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며, 그가 프랑스와는 거리가 먼 구파발 출신이라는 게 전부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건이 불거진 초기에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심지어 부당한 마녀사냥이라는 불쾌감마저 표출했다.


김대중 전문연구가인 장신기 박사의 역작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도서출판 시대의창 발행)」의 내용을 잠시 인용하자면 이즈음 김 전 대통령은 4대국 외교를 완성하는 차원에서 1999년 5월 러시아를 방문해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한 터였다. 대한민국이 분단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네 강대국 모두와 확고하고 지속가능한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그가 1971년 4월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 ‘4대국 안전보장론’을 내놓은 이래로 김대중 필생의 대외적 목표였다.


김대중은 국제무대에서 경제외교와 안보외교를 병행해야만 하는 고단한 처지였다. 한국은 전임 김영삼 정부 말기에 터진 외환위기 사태로 말미암아 IMF 관리체제 하에 놓여 있었다.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촉발된 북핵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70대 중후반의 적잖은 나이에 다다른 김대중이 노구를 이끌고 외교현장 일선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하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김대중 입장에서 옷로비 스캔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다. 옷로비는 본질적으로 실패한 로비였을 뿐더러 김대중 전 대통령 자신과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억울한 마음을 꾹 억누르며 민심과 맞서기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러한 결심의 이유와 동기는 크게 둘로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로 나라경제가 사실상의 부도사태를 맞이한 엄중한 시국에 내로라하는 고위공직자의 반려자들이 유수의 재벌회장 아내와 어울려 서울 강남의 화려한 고급 의상실을 들락거린 건 국민정서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둘째로 김대중에게는 원활하고 성공적인 국정운영이 정치의 기본이고 근본이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모양새 따위는 지엽말단적인 부수적 사항에 불과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의 화해를 앞당기는 민족사적 사명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조기에 졸업해 서민경제를 안정시키는 과제가 그에겐 다른 무엇보다도 절실한 급선무였던 것이다.


겸손했던 김대중과 기세등등한 윤석열


옷로비 소동으로부터 거의 사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은 현재 경제위기와 안보위기의 이중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와 영락없는 닮은꼴인 셈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의 난국과 윤석열 정부의 궁지 사이에는 결코 소홀히 간과해서는 안 될 세 가지 중차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능력의 차이다. 김대중의 국민의정부는 위기를 극복하는 해결사 역할을 떠맡은 정부였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위기를 초래하거나 또는 조장하는 사고뭉치, 즉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 정부로 판단된다.


두 번째로 목적의 차이다. 김대중 정부와 당시의 집권여당인 국민회의는 국정운영의 성공이 먼저였고, 대통령 개인의 체면과 스타일은 나중이었다. 반면, 윤석열 정부와 현재의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부부의 심기를 경호하고 체통을 살려주는 게 우선이다. 국정운영의 성공은 후순위일 따름이다.


세 번째로 태도의 차이다. 필자는 바로 이 태도의 차이가 윤석열 정권에 대한 분노와 환멸을, 노여움과 실망감을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을 뛰어넘어 대다수 중도층 유권자들로까지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ㆍ전이시키는 핵심적 원인이라고 분석ㆍ진단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윤석열 현 대통령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도덕적 명분과 대중적 지지기반, 그리고 국제적 명성을 확보했었다. 그는 그야말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김대중과 달리 윤석열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다. 한마디로 표현해 윤석열은 눈 떠보니 대통령인 인간이었다.


수십 년에 걸친 고되고 혹독한 고난과 탄압을 이겨내며 네 차례의 도전 끝에 집권의 꿈을 이룬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노벨상까지 수상한 김대중도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덕함을 사과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들은 독재정권에 저항해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다 감옥에 갔던 시절 10년 가까이 신림동 고시촌에 틀어박혀 사법시험 준비에만 매달렸던 윤석열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야당과의 전쟁과 언론과의 전쟁과 국민과의 전쟁을 동시에 불사할 태세다. 세계 최강국 미국조차 겁내고 부담스러워하는 양면전쟁도 아닌 무시무시한 삼면전쟁을 자청하는 윤석열의 자신감의 근거는 뭔지 아시는 분이 있으면 필자에게 좀 알려주시기 바란다.


김대중은 외교적 업적을 이루고 귀국해서도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윤석열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는 중간에 통역까지 끼어드는 48초짜리 길이의 안부 인사를 교환하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는 일본 외교당국 측이 회담도 아니고 간담으로 평가절하한 30분간의 좌담을 나눈 게 고작이다. 이게 여론과 언론과 야당은 외교참사라 비판하고, 윤 대통령 스스로와 윤핵관들은 엄청난 성과물을 낳은 성공적 정상외교 활동으로 앞 다퉈 극찬한 이번 일주일간의 순방외교 성적표이다. 96세로 타계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이 무산된 어이없는 해프닝을 평가항목에서 제외해서는 안 되겠다.


대통령의 진솔한 대국민 사과가 있어야만 마땅할 자리에는 현 정권 주요 인사들이 이제 전 국민을 상대로 청력검사를 강요하는 희대의 블랙 코미디가 들어섰다. 사과해서 망하는 정권은 없었다.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며 무익한 버티기를 고집하다 비참하게 몰락한 권력과 권력자들이 숱하게 있었을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전에 사과는 윤 대통령 부부의 애견인 토리가 야밤에 느닷없이 입에 물고 나타난 껍질색깔 누리끼리한 사과 한 개가 아무래도 전부인 성싶다. 오연한 주인을 대신해 사과에 나섰던 토리의 무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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