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도 알고 보면 육식형 국가
국력의 우열은 항시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어떤 나라이건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조선이 후금 즉 청나라에 침략당한 역사는 뚜렷이 인지할지언정 조선왕조 초기와 중기에 조선군 장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수시로 건너가 여진족 부락들을 습격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거론하지 않는다.
폴란드는 강대국 틈에 낀 약소국의 비애를 오랫동안 겪어온 나라로 한국인들의 입에 우리나라와 나란히 빈번하게 언급되어온 국가다. 그러므로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수상한 탁월한 물리학자이기 이전에 유관순 열사 범주의 열렬한 애국 소녀로 한국인들에게 깊이 각인돼왔다.
그런데 폴란드도 남의 나라 영토를 침탈한 이력에서는 결코 남부럽지 않은 나라다. 중근세의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연합왕국을 꾸려 발트 해에서 흑해 사이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야성미 넘치는 민머리 캐릭터로 유명한 율 브리너 주연의 할리우드 고전 영화 「대장 부리바」는 폴란드의 침공에 저항하는 러시아 민족의 치열하고 처절한 항쟁을 다룬 작품이다.
이제 수백 년을 건너뛰어 20세기로 시선을 확 옮겨보자.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과 역시나 새로 건국된 지 얼마 경과하지 않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즉 소련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양측 모두 각각 100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병력을 동원한 엄청난 전쟁이었다. 허나 바로 직전에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의 초현실적인 규모에 가려진 까닭에 해당 전쟁이 왜소하게 여겨지는 착시효과가 초래되고 말았다.
소련과 폴란드의 전쟁은 처음에는 폴란드가 백군을 편든다는 구실로 러시아 내전에 개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전열을 정비한 적군(赤軍)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폴란드는 수도 바르샤바까지 함락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피우수트스키의 지휘를 받은 폴란드 군대가 투하체프스키가 이끄는 소련군을 기적적으로 물리치는 ‘비스와 강’의 기적을 연출하면서 전세는 단숨에 재역전되었다.
폴란드는 승전의 여세를 몰아 소련 영토로 다시 쳐들어갔고 두 나라는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적당히 쪼개 나눠 갖는 내용의 조약을 발트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체결하는 형태로 전쟁을 마무리한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자주독립과 고토 회복의 영광을 연달아 실현한 쾌거였고, 소련에게는 잠시 시간을 벌고자 금쪽같은 땅을 외세에 내어준 굴욕적 사건이었다.
소련은 나중에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20년 전에 상실한 영토를 전부 되찾게 된다. 소련군 보안부대가 자행한 폴란드군 포로 대량학살 만행도 본질은 폴란드에 소련의 분풀이였다. 기실 폴란드도 예전 소련과의 전쟁에서 사로잡은 러시아군 포르들을 폭력적으로 학대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현대적인 전격적 개념의 창시자였던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기습적으로 숙청한 데에는 투하체프스키가 바르샤바 전투의 패배 책임을 스탈린 탓으로 돌린 데 대한 앙갚음도 적잖이 작용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생생히 예증하듯이 성격 더러운 사내의 병적으로 좋은 기억력은 잔인한 복수극의 서막으로 자리하곤 한다.
결국 이래저래 가엾고 불쌍한 희생양은 우크라이나인들이었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소련이 싸울 때도 주된 전쟁터였고, 독일군과 소련군이 전투를 전개할 적에도 중심적 전장이었다. 유럽 열강의 군대는 우크라이나를 가로질러 러시아의 심장부로 진격했고, 반대로 러시아와 그 후계국가인 소련은 광활한 우크라이나 평원을 횡단해 중부 유럽과 서부 유럽으로 맹렬히 돌격했다.
푸틴은 스탈린의 보급형 축소판일 뿐
작금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국경선을 따라 감돌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는 한 세기 전 무렵에 러시아와 폴란드 접경지역에서 펼쳐진 살풍경한 광경을 연상시킨다. 단, 여기에는 두 가지 차이점과 한 가지 공통분모가 병존하고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100년 전의 폴란드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비교해 군사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강력했다는 부분이다. 단적으로, 러시아의 100만 대군에 맞서서 폴란드도 거국적인 국민 총동원령을 발동해 100만 명의 대병을 전선에 투입했다. 우크라이나는 겨우 10만 명 수준의 러시아군 앞에서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는 재래식 전력만 배치해둔 상태다. 핵무기 같은 치명적 전략자산은 아예 필요조차 없다는 자신감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러시아 군대를 서쪽으로 진군시킨 두 주역이 동기에서나 이념에서나 천양지차라는 대목에 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10월 혁명이 단일 국가 차원의 일국 사회주의 혁명의 한계를 벗어나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타도하는 영구혁명으로 도약하는 계기와 동력을 확보하고자 폴란드를 침략했다.
문제는 트로츠키가 당시의 폴란드 민중은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아닌 폴란드의 자본가와 지주에게 더 단단하고 끈끈한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 있었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이 추축국 진영의 패망으로 종식된 다음 폴란드를 식민지와 다름없는 위성국가로 전락시킨 사정을 감안하면 혁명 수출에 뛰어든 붉은 군대에 대항해 총을 든 폴란드 인민대중의 판단은 결과적으로는 대단히 옳은 결정이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원 레온 트로츠키와는 정반대로 러시아연방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관철ㆍ증진하려는 목적에만 근거해 우크라이나를 도모해왔다. 푸틴이 1920년에 쌍안경으로 저 멀리 바르샤바를 노려보던 트로츠키보다는, 1945년에 얄타에서 병든 루즈벨트와 지친 처칠을 상대로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스탈린에 훨씬 더 가까운 연유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중무장한 러시아 군대가 서방으로 몰려가는 사태를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남조선 지식인 사회의 단순하고 협소한 시야이다.
1920년을 전후한 조선 좌파지식인들에게 바르샤바로 거침없이 육박하는 소련군 대오는 힘차게 행진하는 희망찬 혁명의 발자국 소리였다. 마찬가지로, 2022년 남한의 주류 진보세력에게 크림 반도의 항구들에 뒤이어 돈바스의 탄광지대마저 우크라이나로부터 무력으로 탈취하길 꾀하는 러시아 육군의 기갑부대 행렬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사슬의 제일 약한 고리를 일격에 끊어내려는 숭고한 대의명분을 지닌 정당한 군사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필자 또한 1980년대를 풍미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와 그 최악의 아류일 스탈린주의의 낡은 잔재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전형적인 586 세대 인간인 터라 러시아에 대해 남한 인민의 평균치 반응과 견주면 상당히 우호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영토적 야욕과 군사적 책동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국이 이웃한 쿠바를 위협하는 짓만큼이나 러시아가 인접국인 우크라이나를 겁박하는 일도 지극히 글러먹은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정의로운 인간은 있을 수 있어도 정의로운 국가는 있을 수가 없다. 단지, 더 악한 나라와 덜 악한 나라가 있을 따름이다. 벌써 수백 년째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는 동네북 신세를 면하지 못해온 우크라이나의 비극적 운명을 반면교사로 삼아 덜 나쁘면서도 더 강한 나라를 건설하자. 세계사의 높고 거친 파도를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자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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