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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 2019년을 결단하고 책임지는 한 해로 - 결단하고 책임지는 국민만이 결단하는 지도자와 책임지는 정치를 낳는다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18-12-31 16: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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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책임제’는 왜 없는가


한 여론조사업체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취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현직 대통령들의 지지도는 번지점프처럼 하락할 숙명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문 대통령의 여론조사상의 지지율 하락은 별로 새삼스런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지지율 하락 자체도, 하락의 속도도 아니다. 지지율이 하락하는 이유가 본질이고 관건이다.


우리나라는 이론적으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나는 이 ‘대통령 중심제’라는 용어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어설픈 제왕 노릇에 탐닉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대통령 중심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원 내각제가 거론된다. 의원 내각제를 내각 책임제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대통령 중심제는 ‘대통령 책임제’라는 표현으로 다르게 불리지 않는다. 대통령은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이지, 책임지는 자리는 아니라는 그릇된 관념을 부지불식간에 대통령 본인에게 심어줄 수가 있는 것이다.


남 탓은 비겁한 자들의 변명일 뿐


여기에 한 개인이 있다. 그 개인이 권리만 누리려 들 뿐, 책임은 한사코 지지 않으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인물은 얌체 또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가기가 곤란해지기 마련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에게는 ‘유체이탈 화법의 대가’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따라붙곤 했다. 자기가 마땅히 책임져야만 할 일들을 마치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들인 양 태평스럽게 논평하는 게 두 전직 대통령이 보여준 대응 태도였던 까닭에서이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대통령 역시 시나브로 몸과 영혼이 따로따로 노는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그 결과 문재인 대통령은 급기야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길 바란다”는, 실물 민생경제의 총체적 파탄으로 말미암아 팍팍하기 짝이 없는 고단한 삶을 힘겹게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서민들의 염장을 제대로 지르기에 딱 좋은 실언 아닌 실언까지 하고 말았다. 국민 모두가 대통령처럼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현실 속 나라가 아니다. 이미 저 세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주업은 포옹과 SNS인가


중대한 국가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로 하는 일은 포옹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현안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효과적 방법을 결단하고 그 방법의 잘잘못에 명백히 책임을 져야만 하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의 정정당당한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통령의 주 업무가 포옹과 SNS가 되다 보니 청와대와 함께 성공적이고 믿음직한 국정운영의 삼각편대로 기능해야 할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관료사회는 남 탓과 죽은 권력에 발길질하는 것으로 문재인 정부의 귀중한 집권 2년차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여당은 야당 탓을 하는 당이 아니다. 결단하고 책임지는 정당이다. 공직사회는 그들이 한때 충성했던 지나간 과거 권력자들의 비행과 일탈을 뒤늦게 헤집고 폭로하는 데만 여념이 없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정권이 전임 정권이 걸었던 실패와 오류의 전철을 다시는 답습하지 않게끔 휴일과 휴가를 전부 반납하고서라도 불철주야로 일해야 한다. 풍부한 휴식과 고연봉, 그리고 직업적 안정성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 공무원이 되고 관료로 임용되는 연유로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돼버렸다고 하겠다.


창조적 소수는 책임지는 소수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그의 역작인 「역사의 연구」에서 창조적 소수야말로 역사 발전의 주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사관은 평범한 인민대중의 역할과 기여를 무시하는 지독한 엘리트주의 관점에 함몰돼 있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그렇지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절망과 분노의 2018년을 보내고 2019년을 맞이하는 한국인들은 토인비적 의미의 창조적 소수의 출현을 뜨겁게 갈망하고 있다.


왜냐? 창조적 소수는 결단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소수는 변화와 혁신이 실종된 정체되고 답답한 현실에 과감한 돌파구를 뚫으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그 돌파구가 가로막혔을 경우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의연하고 담담하게 감당하면서 고난과 순교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다. 중요하디 중요한 핵발전소의 존폐 여부와 대학입시 정책의 방향마저 이른바 공론화 위원회에 무책임하게 떠넘긴 채 고액의 월급과 판공비만 악착같이 꼬박꼬박 챙겨가는 문재인 정권 핵심 구성원들의 정반대 지점에, 결단을 사랑하고 책임지기를 즐기는 그와 같은 진취적인 창조적 소수가 존재하는 셈이다.


박근혜 정권과 자유한국당은 선택과 책임을 미꾸라지 같이 요리조리 회피하다가 비참하게 몰락했다.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은 선택과 책임 대신에 얄팍하고 알량한 감성팔이와 극렬 지지자들을 동원한 인터넷 공간에서의 반대파 조리돌림에만 몰두해온 터이다.


군소 야당들의 실상은 한층 더 참담하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은 언제 공중분해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고, 정의당은 더불어민주당 2중대에 불과한 한심한 사꾸라 정당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다. 시민사회단체들과 학계와 종교계는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벼슬자리 하나 얻기 위해 거치는 직업소개소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고, 언론은 어용언론 반 족벌언론 반의 부패와 난맥상을 겪고 있다.


국민이 결단하고 국민이 책임지자


2019년 새해에는 한국인들이 결단과 책임의 미덕을 회복하기 바란다. (나무위키 신년 일출 사진)

훌륭한 국민이 훌륭한 정치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결단하고 책임지는 국민만이 결단하고 책임지는 대통령과 정부를 가질 수 있다.


노빠든, 박빠든, 문빠든 다종다양한 빠들은 어째서 사회에 암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가? 그들은 특정 정치인에게, 특정 정당과 특정 정치세력에게 권력만 아니라 판단과 생각까지 위임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더하여 판단과 생각조차 맡기는 그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남한땅에서 주민등록증 발급받은 좀비가 될 따름이다.


20세기 한국인들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그것도 단기간에 성취하는 전대미문의 기적을 이룩한 원동력은 국민들 스스로가 결단하고 책임지는 삶을 기꺼이 자청했던 덕분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인가 대다수 한국인들은 주체적 결단과 책임의 미덕을 잊고 잃었다. 소통과 공감이라는 빈껍데기 허울 아래 악쓰고 울고불고 징징거리며 남의 동정과 관심을 구하는 게 할 줄 아는 일의 전부가 되었다.


바꿔야 한다. 사회와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나를 바꿔야 한다. 변해야 한다. 정치와 나라를 변화시키려면 그에 앞서서 일반 국민이 변화해야 한다.


경영자는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근로자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필요한 최상의 방법을 결단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고 제공하는 제품과 용역의 품질을 지속가능하게 높여나갈 수 있는 최선의 작업방식을 결단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학생도, 주부도, 농민도, 자영업자도 이제는 결단하고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2019년은 빈부귀천을 아우르는 남녀노소 모든 국민이 결단할 수 있고 책임질 줄 아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는 남 탓 하지 않는 대통령을, 남 탓하지 않는 집권여당을, 정권만 죽어라 탓하지 않는 야당들을, 무조건 시대와 환경만 탓하지 않는 공무원들과 기업인들과 노동조합과 지식인들을 비로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결단과 책임은 번영과 자주의 다른 말이다. 남 탓은 불행과 예종의 동의어이다. 2019년을 예종과 불행의 질긴 사슬을 통쾌하게 끊어내고, 평등하고 보편적인 행복과 자주적인 인격적 삶으로 나아가는 원년으로 승화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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