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스포츠와 정치는 어떻게 다른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하 유시민)이 4월 15일 치러질 예정인 제21대 총선에서 현재의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모두 합쳐서 180석을 석권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유시민의 총선 전망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반응이 묘하게 차별화된다. 유시민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운동의 실제적 사령탑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부터가 갑자기 화들짝 놀란 기색이다. 반면에 미래통합당은 물론이고 국민의당까지도 여당의 싹쓸이를 막아달라며 일제히 대국민 읍소작전에 들어갔다. 유시민의 한마디가 여당을 잠자는 토끼로, 야당을 깨어 있는 거북이로 각각 규정(Framing)해놓은 것이다.
스포츠에서의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나 구단이 이길 것 같을 때 자연스럽게 경기장으로 발길을 향하는 법이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맹활약하던 무렵의 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는 지고 있어도 결국에는 이길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에 야구장으로 구름 같은 관중들을 불러 모았다.
선거에서의 유권자는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자가 열세에 처한 느낌이 들 경우에 열심히 투표장으로 달려가기 마련이다. 평화민주당에서부터 새정치국민회의까지, 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던 정당들은 당장은 이기고 있어도 나중에는 질 듯한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노련하게 풍김으로 말미암아 지지자들을 더욱더 단단하게 결집시킬 수가 있었다.
국내 최초의 데이터정치평론가인 최광웅 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장이 그의 신간인 「이기는 선거」에서 제시한 분석틀을 창조적으로 인용해 이러한 구조와 현상을 정리하자면, 스포츠는 강자에 편승하려는 밴드왜건(Bandwagon) 심리가 지배하는 공간이고, 한국의 선거정치는 약자를 동정하는 언더독(Underdog) 효과가 맹위를 떨치는 영역인 셈이다.
전략의 완성은 절박함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이제는 진담처럼 통용되는 농담이다. 필자가 세련된 디자인의 화려한 옷을 사려다가 늘 막판에 주저하는 건 단지 값비싼 가격표 때문만은 아니다. 미완의 패션이 또다시 재연될 상황이 저어된 탓이다.
“전략의 완성은 절박함이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와 김헌태 매시스컨설팅 대표 같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정치 컨설턴트들이 선거 출마자들의 자문에 응할 적마다 빼놓지 않고 해주는 조언이다.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은 패배의 두려움이 턱밑에 차오를 때가 돼서야 제안된 전략의 실행에 비로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나서는 까닭에서이다.
감정은 바이러스만큼이나 전염성이 강하다. 정치인이 절박해지면 지지자들도 절박해진다. 정당의 지도부가 자만심에 도취하면 당원들도 지도부를 따라서 방심에 빠진다.
후보의 절박함은 운동선수의 투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김대중의 절박함은 김종필과의 DJP 연대를 낳았다. 노무현의 절박함은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명숙의 느긋함과 문재인의 여유만만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어이없는 역전패로 제각기 이어졌다. 박근혜의 궁극적 몰락은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한가하게 진박검증에 골몰한 사태에서 그 씨앗이 뿌려졌다.
유시민, 영남 삼김에게 고춧가루를 뿌리다
유시민의 여당 180석 시나리오는 보수층 유권자들의 위기의식을 한껏 자극하고 고조시켰다. 선거의 승패를 최종적으로 좌우하는 스윙 보터(Swing Voter) 구실을 전통적으로 맡아온 중도 성향 유권자들에게는 문재인 정권의 독주와 일방주의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본능적 견제심리를 작동시켰다.
보수층 유권자들이 절박해지면 그 불똥은 영남 지역에서 출사표를 던진 더불어민주당 소속 전직 장관 출신 후보자들에게 즉각 튀게 된다. 근소한 우위 혹은 박빙의 판세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온 김두관, 김부겸, 김영춘 영남권 3김(金)에게 유시민의 호언장담은 청천벽력처럼 들릴 가능성이 크다. 유시민의 오만방자한 발언에 호남의 지역구 국회의원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이 전부 독식할 가능성이 크다는 언론보도까지 더해지면 선거전은 고전적인 영호남 대결양상으로 치달을 공산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나쁜 왕비가 마법의 거울을 보며 던지는 질문은 항상 똑같았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는 식상한 물음이었다. 단지 왕비보다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백설공주는 왕비에게 구박을 받았더랬다.
김영춘, 김두관, 김부겸 영남권 진보 3김의 결정적 공통점은 유시민을 제외하면, 현재의 범여권에서 차기 대선에 내세울 수 있는, 영남 지역에 기반을 둔 잠재적 대권주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김경수 경남지사는 드루킹 일당의 댓글조작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한때 강남좌파의 기린아로 각광받았던 부산 태생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내로남불의 화신으로 평범한 인민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고 말았다.
유시민은 기본적으로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본인의 선거 관련 언급이 어떠한 정치적 파장과 후과를 초래할지 절대 모를 인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유시민의 호언정담은 야당 지지자들로 하여금 절박한 심정으로 투표장에 가도록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유시민을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그의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 유시민은 필자 같은 무명의 메시지 크리에이터가 얼굴을 마주하고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너무나 높은 곳으로 진즉에 가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무슨 동기로 야당 지지층 결집 유도 발언을 했는지 이런저런 정황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조심스럽게 유추해볼 도리밖에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시민이 김부겸과 김두관과 김영춘에게 해가 되면 됐지, 전연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을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느닷없이 왜 불쑥 꺼냈는지를.
그래서 소환된 스토리가 백설공주에 나오는 못된 왕비 이야기였다. 자기보다 미모가 뛰어난 공주의 존재를 결코 인정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성미 고약한 왕비 말이다. 이때 시기와 질투심이야말로 왕비의 폭력적 행동을 개연성 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 두 가지 유력한 열쇳말이다.
유시민 정도면 권력과 금전과 명예 모두에서 가질 만큼 가지고, 챙길 만큼 챙기고, 누릴 만큼 누리는 사람이다. 백설공주의 왕비도 외모에서는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더랬다. 질투와 시기의 잣대면 동화 속 심술꾸러기 왕비의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명쾌하게 소명되는 연유이다.
허나 유시민은 백설공주를 핍박한 못된 왕비와는 손쉬운 비교를 불허하는 난해하고 입체적이며 복합적인 다면적 캐릭터이다. 유시민의 미스터리한 행위의 동기를 시기와 질투심 이외의 요소에서 찾아내기 위해 필자는 앞으로 유시민 연구에 가일층 박차를 가해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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