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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⑤ “김대중에게 정치는 곧 국민을 살리는 일” - 김대중 대통령은 이역만리 망명지에서도 경제 연구에 매달려

공희준 편집위원

  • 기사등록 2019-10-21 17: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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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경제대통령’은 DJ가 출마자 자격으로 맞이한 마지막 대선이었던 1997년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회심의 승부수로 들고 나온 야심찬 표어였다. 세칭 ‘IMF 사태’를 맞이한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제 최후로 기댈 수 있는 믿을만한 언덕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뿐이었다.

경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단연 자신감 넘치던 분야였다. 그가 인생의 황혼기일 1997년에야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건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나라에는 이로운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를 모르는 인물이 집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불행해지는 사회계층은 수많은 평범한 서민들인 연유에서이다. 장신기 박사는 경제대통령 김대중의 풍모가 여전히 폭넓게 평가받지 못한 현실에 대해 무척이나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공희준(이하 공) : 김대중 대통령은 「대중경제론」을 집필한 데서 보여주듯이 경제와 민생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한 인물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진보개혁 세력으로 불리는 진영에 속한 정치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준비된 경제대통령’으로 인정받게 된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청년 사업가 김대중, 어음 문제로 고전해봤다


DJ는 경제대통령의 모습을 갖추고 미국서 돌아왔다. 오른쪽은 부인 이희호 여사. (사진 :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장신기(이하 장) :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기업을 직접 경영해본 경험이 있는 실업가(Businessman) 출신 정치인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 만약 자신이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계속 사업에만 전념했다면 엄청 큰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네 번째로 대권도전에 나섰던 1997년 대선의 어느 유세 현장에서 그는 자기가 기업인으로 남아 있었으면 현대그룹이나 삼성그룹과 자웅을 겨루는 ‘DJ 그룹’을 일궈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필자가 귀로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기업인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은 사업가로서 수완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이전에는 사업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민생경제의 현황과 흐름에 대해 남다른 현실감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거의 10년 동안 사업가로 활동했습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의 경력이 학생운동 아니면 시민운동인 경우가 빈번한 다른 민주개혁세력 계열의 정치인들과는 그가 뚜렷이 다른 점입니다.


공 :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 돈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해본 경험이 아주 많다는 뜻이네요?


장 : 예 그렇습니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간의 대단히 반갑지 않고 치명적인 공통분모가 있다. 남에게 자기 돈으로 월급 줘본 적이 없는 유복한 인사들이 정권 실세로 행세했거나 또는 행세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대다수 평범한 서민대중의 실질적 삶의 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에 골몰한 까닭은 두 정권 모두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민간에서 해봤던 경험이 결여됐거나 부족한 사람들이 권력의 중추부를 구성한 데 있다고 확신한다.


장 : 김대중 대통령은 젊어서 사업을 하던 시기에 어음을 제때 결제를 받지 못해 피가 마를 것 같았던 경험이 있었다고 나중에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실물경제 종사자들에게 동병상련의 애정과 동지적 유대감을 느껴온 것은 그 또한 사업을 하면서 언제 부도가 날지도 모르는 어려운 고비를 숱하게 겪었기 때문입니다.


소장파 의원 김대중은 국회의 대표적 경제통


김대중 대통령은 제6대 국회에 진출해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약칭 재경위)에서 활약했습니다. 당시는 국가가 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관료가 자본가들, 즉 기업인들 머리위에서 군림했습니다. 관료들이 권력에서도, 실력에서도 민간을 월등히 능가하던 그때, 김대중 대통령은 국회에서 경제정책을 주제로 토론과 논의를 하면 장관과 차관 같은 전문적인 기술관료(Technocrat)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정치권의 대표적 경제통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경제에 관심이 많았을 뿐더러, 경제정책을 다루는 일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정치의 기본은 경제다”는 김대중 정치철학의 핵심적 요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다른 야당 정치인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면모를 과시한 것은 그의 실사구시적인 태도에 크게 힘입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국회의원은 여당과 정부를 향해 호통만 치는 게 능사인 힘센 벼슬이 아니었습니다. 실력과 전문성에 근거해 정부 정책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재경위를 활동무대로 선택한 건 그곳이 관료와 교수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쟁쟁한 경제전문가들을 상대로 치열한 쟁론을 벌이면서 자기 역시 국가경제에 대한 실력을 키우고 식견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중경제론」은 김대중 대통령의 그러한 노력과 의지가 낳은 귀중한 열매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중경제론’이라는 표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67년에 창당된 신민당에 참여해 정책심의위원장으로 일했습니다. 정책심의위원장은 지금의 정책위의장과 기능적으로 비슷한 직책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때 신동아를 비롯한 다수의 잡지들에 경제관련 기고문을 보내며 ‘대중경제론’을 부각시켰습니다.


국내에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대중화된 건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브랜드 매니지먼트(Brand Management)의 개념은 1990년대에야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본인의 이름을 적절히 활용한 경제담론을 세상에 내놓은 모습을 미루어 보건대 그는 웬만한 카피라이터 못잖은 상당히 탁월한 조어 능력을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고도성장에 걸맞게 국민들의 실질적 삶의 질을 끌어올릴 경제정책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현해낼지를 고민하고,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로 ‘대중경제론’을 등장시킬 때가 그의 나이 40대 중반 무렵이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서 1982년 12월에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는 이듬해인 1983년 9월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정식으로 첫발을 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3년에 일본에서 1차 망명생활을 할 즈음에 하버드 대학의 연구원으로 이미 위촉됐었습니다.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생활 등 파란만장한 삶을 차례로 거치며 하버드행이 오랫동안 미뤄져 왔었습니다.


일반의 통념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은 하버드에서 있으면서 정치와 외교를 주제로 연구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DJ는 이역만리의 땅에서 뜻밖에도 경제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논문제출 의무가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대중참여경제론」이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을 끝내 집념 있게 완성시켜 대학당국 측에 제출하고 맙니다. 이 논문은 1997년에 한국에서 정식 단행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 미국으로 어렵게 망명을 떠난 후에 기어이 경제관련 논문을 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에 관해 얼마나 커다란 열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웅변하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진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언젠가 집권하게 되면 나라 경제를 어떤 방침과 방향으로 운용하겠다는 일목요연한 청사진을 일찌감치 미리 체계적으로 마련해놓았습니다. 왜냐? 김대중에게 정치는 곧 국민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혹독한 탄압을 받는 와중에서마저 경제의 역할과 중대함에 대한 강조와 언급을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현실정치적 전력전술은 그 다음 순서였습니다. “실사구시의 민본정치”, 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카리스마 없는 시대에 정치인의 내공은 필수


1997년 연말에 간행된 「대중참여경제론」은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정책의 집약체였다.공 : 김대중 대통령은 필요할 경우에는 단기적 여론과 과감하게 맞서는 위대한 정치가적 행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인들은 그때그때의 대중의 즉자적 반응에 SNS로 얄팍하게 영합할 따름이지, 장기적 국리민복의 증진에 요구되는 긴 호흡의 선택과 결단을 좀처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생각과 동선이 이렇게 작고 협소해진 상황에서 DJ처럼 일세를 풍미한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어떠한 준비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김대중 전문연구자의 입장에서 말씀해주십시오.


장 : 지금은 특정한 정치적 진로를 택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거나 혹은 억울하게 영어의 몸이 되어야만 하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닙니다. 


공 : ‘악플’과 ‘좌표 찍기’로 대변되는 인터넷상의 조리돌림이 무섭다면 무서울 뿐입니다.


장 : 권력을 장악한 쪽에서 휘두르는 여러 가지 유무형의 제재와 채찍이 두렵지 않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그럼에도 탄압을 이기고 견디며 정치적 카리스마를 만들어가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고 명료합니다. 강력한 리더십은 카리스마의 뒷받침을 받아야 배양되고 확보되기 쉽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21세기 한국사회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육성되고 출현하기에는 굉장히 부적합한 풍토임은 분명합니다.


필자는 ‘안철수 현상’이 급속히 쇠락한 원인들 중의 하나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에게 카리스마적 면모가 부족한 부분에 있다고 강조해왔다. 허나 이걸 전적으로 안철수의 책임만으로 돌리기는 곤란하다. 안철수 전 대표를 겨냥한 공격과 흠집 내기 시도는 거창(?)하고 가시적인 탄압이 아닌, 조직적이면서도 지질한 조리돌림의 성격과 양태를 줄곧 띠어온 탓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헌신의 측면, 투쟁성의 측면, 그리고 이지적 측면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으뜸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예외적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로 자리매김될 수가 있습니다. 21세기 한국은 김대중 대통령이 생존했던 시대와는 많은 지점에서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자원을 동원하고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도 그에 상응해 변화해야만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변함없이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공입니다. 내공이야말로 어느 한 정치인이 국민들의 지속적 신뢰와 기대를 오랫동안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기초적 자질이자 덕목인 까닭에서입니다. (⑥편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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