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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② 김대중 대통령은 ‘중도 민족주의자’였다 - 「김대중 전집」은 햇수로 15년에 걸쳐서 만들어져

공희준 편집위원

  • 기사등록 2019-10-16 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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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글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에 못잖게 쉽지 않은 일이 다른 사람의 썼던 글을 수납해 정리하는 작업이다. 좋은 편집자 없이는 좋은 글은 나올 수 있어도, 좋은 책은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집」이 탄생하는 과정에는 오랜 시간의 숙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울인 노고가 있었다. 찰나의 영상의 시대, 감각적 단문의 SNS글 시대에 묵직한 울림과 느낌의 「김대중 전집」이 어떠한 고비를 통과해 독자들 곁에 찾아오게 됐는지를 장신기 박사로부터 들어보았다.

공희준(이하 공) : 전집을 제작하는 일은 엄청나게 방대한 작업입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김대중 전집」을 만들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완결된 형태의 말과 글만 「김대중 전집」에 들어가


장신기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현재의 과소평가 풍조에 대해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사진 김한주 기자)

장신기(이하 장) : ‘김대중 도서관’이 재정적 기반이 안정됐다면 「김대중 전집」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히 집계하기가 쉬울 텐데, 저희 조직이 자금력이 탄탄한 곳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얼마의 인원이 동참했다고 소개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에 기간에 관해선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전집 작업이 시작된 시점은 2005년도였습니다.


공 : 김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네요.


장 : 예, 그렇습니다. 저희가 그때부터 관련 자료 수집에 착수했습니다. 저희가 전집에 수록될 수 있는 자료로 설정해놓은 기준이 있었습니다.


공 : 어떤 기준이었나요?


장 : “김대중 대통령의 말과 말 가운데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희는 이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생전에 말씀하신 내용과 쓰신 글을 일단 전부 먼저 모아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미처 손에 넣지 못한 까닭에 「김대중 전집」에 들어가지 않은 자료들이 어디엔가 존재할 가능성을 물론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전집 발간 직전에야 입수됐거나 발견된 일부 자료들은 예정된 작업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작업이 지금부터 만으로 14년 전인 2005년에 시작된 터라 전집 제작에 참여한 분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김대중 도서관 직원으로서 참여한 사람, 프로젝트 팀의 일원으로 참여한 사람, 그리고 전문가 자격으로 조언을 해주신 분들을 통틀어 아우르면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인기투표식 전직 대통령 평가는 바람직하지 않아


공 : 김대중 대통령이 탁월한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통찰력 있는 사상가이자 빼어난 정책 전문가로서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해왔습니다. 장신기 박사님께선 이와 같은 일종의 불일치(Mismatch)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장 : 저는 여기에서 반론 아닌 반론을 펴고 싶습니다. 선배님께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사상가나 전문가로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고 지적하셨는데, 저는 김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도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여론조사의 수치들을 살펴보면 긍정적 평가 순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거의 고정적으로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와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1등을 놓고서 항상 경합을 벌이고 있고요. 여론조사는 인기투표 성격을 띠기 마련입니다.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큰 격차를 드러내곤 합니다.


장신기 박사는 이 부분에서 울분 혹은 비애 비슷한 감정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필자에게는 느껴졌다.


그렇지만 대중의 인식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존재감이 그리 강하지를 못합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후임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토리의 측면에서 워낙 강렬했던 것도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 방식으로 진행하는 전직 대통령 평가를 대중가요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가왕 조용필과 비교해 걸그룹 트와이스가 훨씬 더 훌륭한 아티스트라는 평가 결과가 도출될 게 명백하다. 이 해괴하고 엽기적인 잣대를 현재 586 세대가 주도하는 우리나라 여론조사 업계가 다른 분야도 아닌 한국 현대 정치사에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수시로 무도하게 들이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김 대통령의 직계 또는 측근으로 분류되는 분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매우 연로한 상황입니다. 이분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제고하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 활동하기에는 연령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한계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공 : 거의 전원이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입니다.


장 :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활동한 인사들과 현재 우리나라의 담론 시장을 이끌고 있는 인물들 사이에는 나이 차이의 간극이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대가 다릅니다. 그와 같은 사정으로 말미암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활발한 평가와 논의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 탓도 큰 것으로 보입니다.


공 : 최근의 인기가요 순위로만 판단한다면 조용필은 물론이고 서태지도 이미 한물간 옛날 가수들입니다. 만약에 대중음악 전반의 우열을 금주의 히트곡 순서로 측정한다면 그런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을 겁니다.


장 : 올해는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10주년입니다. 그런데 김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이해 그분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긴 의미와 발자취를 되짚는 책들이 제가 알기로는 서점가에 등장하지를 않았습니다. (착잡한 말투로) 누군가 김대중 대통령 관련 도서를 출판할 기획을 분명 추진했을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인지하는 범위 안에서는 그를 주제로 하는 서적이 서거 10주기가 되는 때를 즈음해 나오지 못했습니다.


공 : 김대중 대통령과 별다른 개인적 인연이 없는 제가 생각해도 엄청 의아하고 찜찜한 분위기였습니다. 장신기 박사를 비롯한 뜻 있는 지식인들이 모여서 만든 「김대중 전집」이 공식적으로 발간됐다면 언론에서 이를 크게 보도해줘야 상식이고 정상일 텐데, 그럼 움직임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간접으로 크게 도움을 받은 매체와 기자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말에요.


필자는 ‘배은망덕’이라는 수위 놓은 원색적 용어가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억눌렀다.


장 :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에서 펴낸 「김대중 전집」과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새로 재판된 경우를 예외로 하면 그 외에는 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을 소재로 삼아 써낸 책은 없는 셈입니다.


공 : 저는 장신기 박사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을 뿐이지, 남한사회의 주류 진보진영과는 싸웠으면 싸웠지 이른바 동지적 관계에 있는 인간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좀 거북스럽지만 사람들 참 야박합니다. 정말 지독한 염량세태입니다.


장 : 선배님은 혁신 언론인이시잖아요. (웃음)


공 : 내가 혁신가는 분명 맞는데 솔직히 언론인은 아니거든요. (웃음)


한민족의 비극적 현실이 현실감각의 중요성 일깨워


「김대중의 옥중서신(시대의창 발간)」은 「김대중 전집」과 함께 김 대통령 서거 10주기에 발맞춰 출판된 단 두 종류의 책이었다.공 :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는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두루 갖춰야만 한다”고 생전에 누누이 역설했습니다. 저는 제도권 정치인이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출 것을 후배 정치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조언한 건 굉장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자칫하다가는 “선명성이 부족하다”는 오해와 비판을 살 위험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김 대통령이 상인으로서의 현실감각에 입각하여 돌파하고 극복해낸 심각한 국가적 위기상황이 있었다면 어떤 일들이 있을까요?


장 : 연구자인 저의 시각으로 분석해보자면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은 분단의 비극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공간이 냉전적 이념대결의 분단현장으로 바뀌는 모습을 본인 스스로가 현실에서 실제로 체험했던 인물입니다.


목포는 요즘은 지방의 작은 소도시로 분류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에는 유동인구도 물동량도 모두 많았던 매우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목포에서 벌어졌던 지역적 차원의 일들을 한반도 남쪽의 보편적 시대상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 지역에서 엘리트들도, 일반 대중도 좌우로 나뉘어 서로 험악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양상을 직접 지켜봤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분단과 전쟁의 참상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광경을 청년 김대중은 너무나 생생하고 쓰라리게 육안으로 목격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후에 겪었던 고초의 단초와 배경이 이때 이미 마련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동족상잔의 비참한 6․25 전쟁 당시에 좌익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으로 취급되는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습니다. 저는 분단과 전쟁을 차례로 경험한 쓰라린 기억이 김대중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중도 민족주의로 정리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 : 김대중 대통령이 채택하고 견지했던 중도파 노선이 여의도 정치권에서 심심할 적마다 운위되는 중도 개혁주의와는 그 결이 다르지 않나요?


장 : 김대중 대통령의 중도 민족주의는 좌우합작 노선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이러한 지향성을 표상하는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절세의 애국자였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현실적 판단의 측면에서는 선생에게도 아쉬운 측면이 있었다는 견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공 : DJ의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한 평가는 어떤가요?


장 : 김대중 대통령은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에 기여한 부분이 있음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일파들을 권력의 요직에 등용한 일은 가차 없이 준열하게 비판했습니다. (③편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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