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엄마, 커피 프린스를 접수하다
두 개의 여론조사 결과가 잊히지 않는다.
첫 번째는 2002년 초봄의 TNS 코리아 여론조사이다.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가상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철옹성처럼 강고하게만 여겨졌던 이회창 대세론에 마침내 균열이 가는 징후가 감지되었다. 이 일은 곧 저 유명한 노풍(盧風)으로 이어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던 여론조사 결과였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대략 만으로 5년 반 정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난 2007년 한여름의 여론조사 결과였다. AGB닐슨 미디어리서치는 SBS 서울방송의 월화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가 서울 지역 시청률에서 동시간대에 전파를 탄 MBC 문화방송 연속극 「커피 프린스 1호점」에 근소하게나마 앞섰다고 발표했다. 거의 필자 혼자서만 특별하면서도 비감하게 유의했던 여론조사였다.
AGB닐슨의 여론조사 결과는 왜 중요했을까? 이는 당시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간에 치열하게 전개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경선전에서 누가 이길지를 확실하게 예고해주는 가늠자였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님의 어투를 고인에 대한 커다란 결례를 무릅쓰고 감히 흉내 내자면 「커피 프린스 1호점」은 홴터지를 뤼얼리스틱하게 스케치했고,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팩트를 유머러스하게 드뤼잉했다.
서울이 없으면 정권도 없다
지금은 서울이 여론을 주도하는 시대다. 광주가, 대구가, 부산이 정권을 창출하던 상행선 정치시대는 2002년 대통령 선거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로는 서울의 선택이 곧 전국의 선택이 돼왔다.
2017년 5월의 조기 대통령 선거는 수도 서울이 견인하는 하향식 정치시대의 전형적 사례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시위 과정에서 서울의 민심을 효과적으로 장악했기에 어렵지 않게 문재인 대세론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뜨릴 수가 있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서울 강북권에 온갖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구축한 교두보를 버려둔 채 ‘2002년의 아름다운 광주경선’의 숙취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한 몇몇 감각 떨어진 참모들의 의견을 좇아 호남과 영남을 헛되이 돌아다니다가 문재인에게 완벽한 빈집털이를 당했다.
안철수에 앞서서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서울의 표심을 방기해 자신도 망치고 종국에는 당도 망치는 미련함의 극치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홍준표는 2004년의 17대 총선에서 서울 동북부 16개 선거구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으로서는 유일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 바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배경과 이점을 너무나 손쉽게 포기한 채 경남에서 ‘시골사또’ 노릇에 열중하다가 서울에서의 귀중한 지지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다시피 했다.
광주를 잃으면 광주를 잃는 것이다. 부산을 잃으면 부산을 잃는 것이다. 대구를 잃으면 대구를 잃는 것이다. 대전을 잃으면 대전을 잃는 것이다. 서울을 잃으면 전국을 잃는 것이다. 홍준표와 안철수는 이 중차대한 이치를 몰랐거나 간과했다. 2012년 시점의 문재인도 서울이 승부처임을 모르거나 경시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까닭에 대통령 선거운동의 마지막 유세를 엉뚱하게도 부산에서 해버리는 자책골을 넣었었다.
서울, 친문에서 반문으로 돌아서다
나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2가지 요소만 중시한다. 추세(Trend)와 서울(Seoul)이다. 때마침 한국 갤럽이 공표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41퍼센트로 정권 출범 이래 최저치를 찍었다고 한다.
나는 요 부분에는 별다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핵심은 서울 지역의 지지율이 전국 평균을 드디어 밑돌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서울 지역 국정수행 지지율이 38퍼센트를 기록한 탓이다.
서울은 유물론의 도시다. 유물론은 사회의 물질적 생산과 경제적 분배의 문제를 모든 가치판단의 제일 첫머리에 두는 철학이요 세계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똑같은 유물론이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부동산 몰빵‘은 유물론의 도시 서울시민들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문재인 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여념이 없는 KBS, MBC, YTN 등의 사실상의 국영방송사들에서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게이트‘에 부지런히 군불을 떼고 있다. 허나 김학의 사건과 김의겸 사태는 본질적으로 심급이, 층수가 다른 사안이다. 불은 건물 내부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문재인 정권은 지붕에만 열심히 물을 뿌리는 격이다. 국민들이 숭례문 화재사건을 통해서 이미 목격했던 낯익고 어이없는 광경이다.
2002년 초봄 무렵에는 강남이 아직은 한국사회의 중심적 화두가 아니었다. 2007년 가을에는 강남은 범국민적 관심사였다. 문재인 정권의 극렬 지지자들에게는 미치고 답답한 노릇이겠으나 2019년의 민심의 지형은 2002년 초봄의 형세에서 2007년 한여름 구도로 급격히 넘어가고 있다? 어디에서? 가장 먼저 서울에서! 2007년과 2019년의 차이점을 굳이 찾자면 2007년에는 가방끈 긴 강남엄마들이 총체적 민심 이반의 주범 역할을 맡았고, 2019년에는 스펙 빵빵한 강남좌파들이 인민들의 폭발직전의 공분과 원성을 자아내고 있다.
강남의 정의와 인민의 정의의 대충돌
필자는 현재 강남 3구에 속하는 송파구 잠실에 거주하고 있다. 아쉽게도 비좁고 저렴한 다세대 전세로…. 경제학자 우석훈은 강남좌파로 도매금으로 분류되기가 싫어 강북으로의 이주를 감행했다. 나는 강남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로 말미암아 강남을 비판한다는 근거 없는 음해와 모함을 원천봉쇄고자 무리하게 강남으로 옮겼다. 이실직고하자면 정말 무리했다.
문재인 정권이 생각하는 정의(Justice)는 강남우파들이 누리던 부와 권력을 강남좌파가 온전히 물려받는 것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강남사람들을 제외한 남한사회의 대부분의 힘없고 가난한 무명씨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강남우파이건 강남좌파이건 상관없이 강남에 넓고 비싼 집 소유하고 있는 성공하고 출세한 기성 엘리트들은 국가권력 자체에 접근을 불허당하는 것이다.
쉽게 비유해보겠다. 강남에 값비싼 집 가진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역시나 강남에 값비싼 집 가진 조국 현 민정수석으로 바뀌는 게 문재인 정권이 신봉하는 방식의 정의라면, 우병우든 조국이든 청와대 근처에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대다수 인민대중이 확신하는 정의의 개념인 셈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만이 참다운 정의라고 계속 우겨댈 것으로 보인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대대표 부류의 덜 떨어져도 한참 덜 떨어진 몇몇 철부지 야당 정치인들의 헛발질과 현 정권의 주특기인 신파조 가득한 감성 마케팅 연출 덕분에 일시적 반등이야 잠깐 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문재인 정권의 서울 지역 지지도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쭉쭉 빠져나갈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이다.
강남엄마 따라잡기 권유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고, 강남좌파 따라잡기 권유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특권적 강남좌파와 평범한 인민 사이에서 강남을 택했다. 그로부터 비롯될 우울한 후과는 오롯이 문재인 정권 스스로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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