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권은 누구의 정권인가
문재인 정권의 본질과 정체성을 둘러싸고 무수한 논의가 여태껏 있어왔다
첫 번째는 ‘호남정권론’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호남권에서 유달리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을 만끽해왔음을 언급하면서 누구의 지지를 받느냐를 중심에 놓는 관점이다.
두 번째는 ‘PK정권론’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김경수 경남지사,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그리고 현 정부의 숨은 실세로 손꼽히는 이호철 전 참여정부 민정수석 전부가 부산경남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인물들임을 강조하면서 누가 정권의 내부자들(Inner Circle)을 구성하느냐에 방점을 찍는 관점이다.
세 번째는 ‘강남정권론’이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래 서울 강남 지역의 땅값이 엄청나게 폭등한 사실에 유의하면서 정확히 어느 지역 어느 계층이 이 정부 들어와 실질적인 물질적 혜택을 봤는지를 중시하는 관점이다.
김헌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이 필자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 집권 초기 18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무려 약 1천조 원의 불로소득이 부동산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한국이 미국과는 차별화된 맥락의 천조국으로 등극한 것이다. 다른 지역 땅값이 산술급수적으로 올라갈 때 강남 땅값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음은 물어보나 마나의 일이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여성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합법적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하여 독일 제3제국을 여성 정권이었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누구의 지지를 받느냐는 정권의 본질적 정체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하겠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에도 그의 집권 기간에 흑인들 같은 유색인종이 미국의 주류로 군림하지는 않았다. 누가 정권의 상층부를 차지하느냐 또한 정권의 본질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에는 심각한 한계가 있다.
조선이 양반의 나라였던 건 사대부 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시키는 정책이 조선왕조 내내 고집스레 강행된 탓이었다. 미국이 백인의 국가인 까닭은 미국이 보유한 막강한 국력이 근본적으로 백인들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용돼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국에서는 백인이 흑인을 살해한 사건보다는, 흑인이 백인을 살해한 사건이 더욱더 비중 있게 취급된다.
관건은 누구의 이익(Whose Benefit?)이냐에 있다. 언론에서는 마치 문재인 정권이 강남을 상대로 엄청난 압박과 제재를 가하는 것처럼 보도하곤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강남의 내로라하는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면 압박당하지 않는 강북과 비교해 여유와 풍요가 흘러넘친다.
문재인 정부는 강남에 열을 주고 하나를 뺏어간다. 강북에는 주는 것도 없고, 뺏어가는 것도 없다. 인간은 얻으면 조용하고 빼앗기면 시끄러운 존재이기 마련이다. 아홉을 챙긴 강남에서 외려 비명소리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강남, 돈과 권력과 명예의 3관왕을 달성하다
박근혜 정권에서 강남에는 돈과 권력만 있었다. 문재인 정권에서 강남은 돈과 권력에 더해 명예까지 마침내 거머쥐게 되었다. 이제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처럼 저 외딴 강북 끄트머리에 거주하는 가난한 인물이 진보진영을 이끌지 않는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같이 재건축공사가 확정돼 시가가 몇 억씩 뛰어오른 강남 한복판의 고가 아파트들에 살고 있는 인사들이 진보진영을 대표한다. 구체적 자산가치도 강남이, 추상적 상징자본도 강남이 깡그리 독식하는 구조가 완성된 셈이다.
과거의 정권교체는 권력이 대구로부터 광주로, 혹은 광주로부터 부산으로 넘어가는 일을 의미했다. 현재의 정권교체는 권력이 강남구에서 서초구로, 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잠실의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로 옮겨가는 일을 가리키게 됐음을 이제는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뚜렷이 깨닫게 되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감은 표면적으로는 전대협과 참여연대가 쌍끌이해온 전통적 운동권 엘리트들에 대한 반감이다. 그러나 심층을 들여다보면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감은 이 정권 들어와서 확고하게 정착된 “보수도 강남, 진보도 강남”인 ‘강남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이를테면 강남좌파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퇴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도 알고 보면 강남에 집을 가진 사람이다. 한국의 서민층 유권자들은 이리 굴러도 강남으로 가고, 저리 굴러도 강남으로 가고 마는 무거운 바윗돌을 영원히 산위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숙명을 강요당한 시치포스와 같은 저주받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권이 작금에 직면한 위기는 소통의 위기도, 도덕성의 위기도, 리더십의 위기도 아니다.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의 힘없고 가난한 평범한 인민대중들에게 해준 일은 너무나 적고, 권세 높고 재산 빵빵한 강남 엘리트들을 위해 해준 일은 너무나 많은 데서 오는 정치적 자아분열의 위기이다.
강남좌파에 대한 환멸은 강남우파의 권토중래를 불러오기 십상이다. 강남우파의 정권탈환을 막아내기에는 강남좌파가 국민들에게 보여준 내로남불의 위선이 목불인견의 지경으로 너절하고 끔찍하다. 자진사퇴 형식으로 물러난 최정호 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집의 채수가 중요하지 않았다. 주택의 위치가 중요했다. 그가 만약에 잠실과 성남 분당과 세종시가 아닌 월계동과 군포 대야미와 괴산군에 집을 갖고 있었다면 그를 향해 다주택자라고 돌을 던진 국민들은 의외로 많지 않았을 게다.
자유한국당은 왜 패배를 도둑맞았나
강남좌파의 실패가 강남우파의 재집권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대못을 박아둘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있다. 문재인 정권이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심보의 출세한 강남 엘리트들의 탐욕스러운 손아귀로부터 더 늦기 전에 탈출하는 것이다. 조국 수석처럼 강남에 값비싼 아파트 소유한 부유한 청와대 참모들을 조용히 집으로 돌려보낸 다음, 강남에 집 가진 인사들을 다시는 장관과 차관이나 청와대 수서비서관 이상의 중책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국민들 앞에 직접 나서 엄숙하게 선언하면 된다.
물론 이는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시나리오다. 문재인 정권은 강남에 불가역적으로 지나치게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확실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권력 수단은 딱 두 가지뿐이다. 검찰과 방송.
검찰이 이전 정권들의 비리를 부지런히 파헤치고, KBS와 MBC와 YTN 등의 사실상의 국영방송사들이 이걸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강남우파에 대한 민중의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는 전략은 문재인 정권이 구사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실지로 구사하고도 있는 거의 유일한 여론반전 대책이자 민심수습 방안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치명적 모순이 수반된다.
첫째, 요즘은 웬만한 검사들도, 국영방송에 입사한 거의 모든 기자와 PD들도 강남 부잣집 아들딸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도 강남에 있지만, 동지도 강남에 있는 다람쥐 쳇바퀴 구도다.
둘째, 민중이 강남좌파에 느끼는 혐오감의 크기가 강남우파에 느끼는 공포감의 크기를 이미 앞지르고 말았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상가건물 매입 파문이 문재인 정권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자 결절점을 이루는 이유는 강남좌파에 대해 느끼는 국민적 혐오감이 강남우파에 대해 느끼는 대중적 공포감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김의겸 전 대변인이 결정적 빌미와 계기를 제공했다는 데 있다. 인민에게는 강남좌파가 강남우파보다 더 꼴 보기 싫은 밉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승리를 도둑맞은 경우는 수없이 많았다. 자유한국당은 2019년 4월 3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패배도 도둑맞을 수 있음을 엽기적으로 증명했다. 아니, 증명당했다. 강남좌파에 대한 혐오감이 강남우파에 대한 공포감을 능가해버린 국민들의 전반적 정서상태를 고려하면 자유한국당이 패배를 도둑맞은 희대의 블랙코미디는 어쩌면 사전에 충분히 예고된 필연적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친 듯이 도로 친박당화를 거듭하는 중인 자유한국당은 마땅히 패배를 당하기는커녕 도리어 뜬금없이 승리를 당했다. 자유한국당으로부터 패배를 도둑질해간 강남좌파들의 건승과 안녕을 기원하는 바이다.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이야기이니 부디 고깝게 듣지 마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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