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만도 못한 대한민국 국회
다스 베이더가 등장할 때의 장중함도 없었다. 다스 베이더의 주군이자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가 특유의 음산한 모습을 드러낼 적의 으스스함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역습 작전은 성공했다. 역습의 대상일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은 물론이고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세 야당에게마저 자유한국당의 역습을 무력화시킬 포스가 없었던 탓이다.
나경원의 역습은 국회의원 정원 증가를 전제로 현행 선거제도를 손질하려는 다른 정당들의 시도에 대항한 자유한국당의 반격을 가리킨다. 자세히 따지자면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의 이해관계도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허나 방금 열거된 4개 정당은 국회의원 증원, 지역구 축소, 비례대표 의원 증가라는 세 가지 지점에서 대체적으로 지향을 같이한다. 학자와 전문가, 시민단체 등 지식인층이 이들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국회 안에서의 의석 분포만 감안하면 자유한국당은 외톨이 신세로 고립된 형국이다. 그렇지만 시야를 나라 전체로 확장하면 국회의원 숫자 줄이고, 비례대표 제도는 아예 폐지하자는 자유한국당의 주장은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다른 문제는 다 떠나서 이 일 하나에서만큼은 자유한국당이 현재의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정당인 셈이다.
자유한국당이 나라 잘되자는 진심어린 충정으로 선거법 개정 문제에서 극단적 대중영합주의에 나선 것은 물론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일관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움직여왔고, 하필이면 여론의 구도가 자유한국당의 이익에 딱 부합되게끔 짜이고 말았다. 역시나 자유한국당은 부활할 능력은 없어도 부활당할 운복은 기막하게 타고난 복불복 정치집단이다.
나는 세비 감축과 특권 철폐를 동반하는 국회의 의원정수 증가와 투표의 등가성 제고에 전폭적으로 찬성한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서 필자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0명 가운데 두셋이나 될까 말까 한 상황이다.
정치인, 범위를 좁히면 국회의원은 남한사회에서 대표적으로 불신 받는 직종이다. 대중의 혐오와 경멸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국회의원과 조폭이 우열을 가리기 곤란할 지경이다. 어쩌면 국회의원의 평판은 조직폭력배의 인상보다도 훨씬 더 나쁠지 모른다. 왜냐하면 조폭을 낭만적으로 미화한 한국영화는 숱하게 개봉되었어도,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활약상을 과감하게 묘사한 영화가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금시초문이기 때문이다.
5‧16 군사쿠데타와 2000년 낙천낙선운동의 공통점
한국에서 가장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정치 문법은 진보정치가 아니다. 보수정치도 아니다. 중도정치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서 단연 잘 먹히는 정치는 ‘반(反)정치의 정치’다. ‘반정치의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의 역할과 가치를 부정하고 저주하면서 하는 무개념의 파괴적 정치다.
한국 현대사에서 반정치의 정치의 효시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박정희 장군은 정치를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폄하하고 매도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자기정치’에 몰두했다. 그 결과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1을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지명하는 사실상의 기상천외한 총통체제가 유신정권의 간판 아래 출현하고 말았다. 오늘 광주로 재판 받으러 가는 전두환과, 병석에 누워있는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역시도 박정희가 창안한 ‘반정치의 정치’를 고스란히 답습해가며 정치를 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반정치의 정치는 철학과 이념이 아니다. 도구이고 수단이다. 도구와 수단에는 사전에 정해진 주인이 없다. 가져다 쓰는 사람이 임자다.
이로 말미암아 반정치의 정치는 자칭 보수진영 또는 산업화세력만의 전유물의 범주를 오래전에 벗어났다. 타칭 진보진영 혹은 민주화세력도 반정치의 정치의 맛에 시나브로 심각하게 도취되고 중독되었다.
나는 2000년 제16대 총선을 즈음에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낙천낙선운동도 그 기저에는 반정치의 정치가 본질적으로 깔려 있었다고 회고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 한반도 남단을 강타한 안철수 바람, 즉 안풍 또한 한 꺼풀 벗겨보면 정치를 저주하고 부정하는 반정치의 정치가 심연에 자리해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무렵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국회의원 숫자를 확 줄이자고 제안한 경우는 단순한 실언의 소산은 아니었다. 그는 안풍에 열광하는 자기 지지층의 정서와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봤다. 간파한 사실을 마음속에 조용히 갈무리하지 않고 굳이 말로 옮겨버린 안철수의 미숙한 아마추어적 사후처리(?)가 굳이 탈이라면 탈이었다.
문재인 정부도 반정치의 정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행태를 보여왔다. 문재인 정권은 소위 직접민주주의를 유달리 강조한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인사들이 팔아대는 직접민주주의는 실상은 인민주의(Populism)로 위장한 폐쇄적 엘리트주의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권이 상정한 민民에게는 단 세 가지 자유만이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누리집 게시판에 청원할 자유, SNS에서 ‘좋아요’ 누를 자유, 때때로 후원금 낼 자유다. 국가의 실질적 정책결정 과정에 관여하고 개입할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현대적 맥락의 민주정치는 엘리트가 아닌 일반민중도 국가의 중차대한 정책결정 과정에 자유롭게 실효적으로 관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정치여야만 한다. 청원 즉 푸념하고 하소연할 자유와, 좋아요 누를 자유와, 후원금 낼 자유만이 평범한 인민대중에게 허락되는 문재인판 직접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은근하면서도 전폭적인 거부이다. 문재인 정부야말로 이제껏 나왔단 반정치의 정치들 중 제일 세련되고 지능적인 형태의 반정치의 정치를 구사한다고 하겠다.
문재인과 안철수도 즐기고 조장한 반정치의 정치
미학에서는 복사본이 원전을 능가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는 일반 대중과는 무관한, 가방끈 긴 것 자랑하는 미학자 나부랭이들끼리의 사정일 따름이다. 욕망이 충돌하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보통의 사바세계에서는 무조건 원조가 최강이고 지존이다. 각종 음식점들이 치열한 원조 경쟁을 벌여온 저간의 배경이다.
안철수의 새정치도, 문재인의 직접민주주의도 뿌리와 원형은 박정희의 반정치의 정치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문재인 대통령의 더불어민주당과 안철수 전 대표가 창당한 바른미래당이 아무리 애를 써봤자 반정치의 정치 종목에서는 박정희의 적장자인 자유한국당을 절대로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 조롱받는 정의당과 국민의당에서 갈라져 나온 민주평화당도 따라서 이 분야에서는 별다른 경쟁력이 없다고 하겠다.
4당은 ‘패스트 트랙’이란 요상한 외국어까지 동원해가며 선거법 개정 관철을 장담하는 중이다. 그러나 민심은 자유한국당 편이다. 정치 그리고 정치인에 대한 증오와 냉소는 현대 한국인의 정서에서 교육열과 남 탓에 필적하는 위상과 무게를 가지는 연유에서이다.
반정치의 정치의 사악한 주술로부터 한국정치를 당장 풀려나게 해줄 뾰족한 대책은 없다. 다만 장기적 해법은 있다. 정치의 효능감과 정치인의 순기능을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체감시켜주는 게 그것이다. 그러자면 ‘새정치’니, ‘직접민주주의’니 운위하면서 정치를 더럽고 불결한 일로 자꾸만 격하시키는 자해행위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만이라도 하루속히 멈춰야 한다.
특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치의 기본적 책무는 청와대 엄호가 아니라 행정부 곧 관료사회의 철밥통을 깨부수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국민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일 필요 없는 직업은 국회의원이고, 그중에서도 더더욱 필요 없는 직원은 그때그때의 집권당의 이데올로기적 색깔에 관계없이 여당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국회를 향한 환멸의 9할은 본인들이 입법부 소속이라는 본분을 망각한 채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공무원들의 거수기 노릇에 바빴던 여당 국회의원들이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제공해왔다. 이러한 구조적 현상은 2019년 지금도 변함이 없다. 고로 자유한국당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을 당한 것처럼, 나경원의 역습은 주효하지 않았다. 단지 주효당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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