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정혜신의 정신마저 사납게 한 딴지일보의 위용
김어준 총수는 문화일보의 딴지일보 인수 제안을 고심 끝에 거절한 이후 단 하루도 돈 걱정에서 해방된 날이 없었다. 보통 인간들 같았으면 후회로 점철된 화병으로 쓰려져도 벌써 몇 번은 쓰러지고도 남았을 총체적 난국이었다.
김어준은 단단했다. 아닌 단단한 척해야만 했다. 왜냐? 그 자신이 김어준이었기 때문이다. 김어준 총수는 즉시 다른 돈벌이 수단을 부지런히 탐색했고, 그렇게 급하게 찾아낸 두 가지 수익 모델이 성인 명랑완구 「부르르」와 패러디 패션 「불끈 악마」 티셔츠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는 수많은 시민들이 집밖으로 몰려나와 길거리응원을 펼치는 문화를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방인 감독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응원단 조직인 붉은 악마가 단체로 맞춰 착용한 적색 반소매 티셔츠는 길거리응원의 필수품처럼 자리 잡으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입는 범국민적 초대박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남들 장사 잘되는 광경을 목도하고 그만 얌전히 앉아 있을 김어준이 아니었다. 어느 의류 제조업체에 주문을 의뢰했는지 정확히 규명할 길은 없으나, 김어준은 색깔과 형태는 유사하되 가슴 부분에 ‘Be The Reds’ 대신 ‘불끈 악마’라고 쓰인 티셔츠를 신속하게 제작해와 대대적 판매에 나섰다. 이와 관련해 어떤 젊은 의상 디자이너가 만든 옷에 딴지일보가 자사의 브랜드를 대여해줬다는 출처 불명의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브랜드 임대가 처음은 아니었다. 일례로 총수는 그의 모교이기도 한 홍익대학교 근처에 위치한 한 주점에 딴지일보 상표를 쓰도록 허락해준 적이 있었다. 딴지일보에 소정의 프랜차이즈 사용료를 지불했을 해당 술집의 상호는 「존나빠」였다. 존나빠에서 마지막 글자 ‘빠’는 속칭 빠순이와 영어의 Bar를 중의적으로 동시에 함의했다. 김어준에게 일석이조의 노림수는 기본 생활수칙이었다.
존나빠의 개업식에는 김주하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와 미술전문가 겸 베스트셀러 작가 한젬마 씨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명망가들이 참석했는데, 유명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가 급히 실내로 들어오려다가 투명한 유리문에 이마를 정면으로 부딪쳐 머리에 크게 혹이 나는 작은 불상사가 발생한 후일담도 전해졌다.
국내 최고 정신과 전문의의 정신조차 수습 불능 지경으로 혼미하고 산만하게 이끌었을 만큼 명랑하고 발칙하며 자유분방한 기질과 물결이 넘실대는 독립적 논조와 자주적 성격의 대안매체가 김어준 총수와 최내현 편집장 쌍두마차 체제로 발간되던, 네티즌들 용어로 리즈 시절의 딴지일보였다.
기존 권력과 기성 권위에 대한 거침없는 반항기와 진취적 도전정신으로 충만했던 과거의 활기차고 당당한 모습을 여전히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재인 정권을 향한 비굴한 아부행태와 비루한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해버린 지금의 초라하고 흑화된 딴지일보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의 이질감과 안타까움만을 끝없이 자아낼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연체의 무거움
불끈 악마 티셔츠는 나름 쏠쏠하게 팔려나갔다. 필자도 그 번뜩이는 재치와 기지에 감동해 한 벌 공짜로 얻어가 2002년 여름 내내 입고 다녔다. 허나 문화일보로의 인수합병이 무산되며 공중으로 허망하게 날려버린 수백억 원의 거금을 티셔츠 몇 장 벌어서 벌충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류 사업을 매개로 벌어들인 수입금으로는 직원들 인건비는커녕 돈도 안 되는 트래픽 증가와 정비례해 늘어나는 서버 유지 비용을 대는 데도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뚜렷한 돌파구가 좀체 발견되지 않자 김어준 총수는 부르르 판매에 다시금 불가피하게 역점을 둬야만 했다. 총수 본인도 성인용품 판매에 관여하는 게 차후에 어떤 꺼림칙하고 무시무시한 후과가 되어 돌아올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이 있어야 내일도 있는 법이다. 김어준은 그를 겨냥해 쏟아지는 온갖 모멸적 언사를 묵묵히 견디며 부르르 판촉에 집중했다. 회사의 현재 형편이 어떤지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는 다른 임직원들도 부르르 세일즈에 전력투구했다. 여기에서는 총수가 공들여 끌어 모은 유능한 필진들로 구성된 편집국 또한 열외가 아니었다. 필자가 대선본부장으로 김어준에게 간택당한 시점은 하필이면 딴지일보가 전사적으로 부르르 영업에 총력전을 펼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필자는 한 달에 60만 원의 원고료를 받는 조건으로 딴지일보에 합류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제시받은 영입 조건은 정상적으로 충족되지 못했다.
원고료를 지급받기로 예정된 날짜가 한참 경과했음에도 돈이 들어올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필자 같은 무명의 새내기 정치평론가는 딴지일보에 글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이 마음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부풀어 오르는 자긍심만으로 집의 우편함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속속 도착하는 휴대전화요금과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30만 원 안쪽에서 충분히 완납 가능한 금액이었는데…. 나머지 30만 원으로는 교통비를 충당하고…. 술과 밥이야 항시 얻어먹으면 되었고….
원고료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글 쓰는 작업을 태업할 수는 없었다. “나는 Insert Coin 해줘야만 움직이는 자판기가 아니다”라는 게 대(大) 딴지일보의 일원으로서 내가 반드시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한편으로는 거창하고, 한편으로는 알량했던 자존심은 각종 공과금이 줄줄이 체납되는 사태 앞에서 결국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제적인 내구력의 한계에 마침내 다다른 필자는 회사의 안살림을 책임진 최내현 편집장에게 “원고비 언제 입금되나요?”를 물었고, 최내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마저 궁지에 몰아넣은 천하의 명검 최내현을 겨우 원고비 몇 푼 탓에 곤혹스럽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 역시 곤혹스러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⑬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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