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엿장수 맘대로’는 엿장수의 천부인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과 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일정을 고려해 집권여당의 대선후보 경선 시기를 뒤로 미룰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한 데 대한 필자의 소감이다.
전재수 의원이 누구이던가? 친문세력에게는 거룩한 성지와도 같은 부산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재선되는 위업을 이룩한 젊은 정치인이다. 더욱이 그는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핵심 참모로 근무하기도 했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정청래가 발설하면 개인의 사적인 잡담에 불과할 테지만, 전재수가 언급하면 문재인 정권 차원의 공식적 견해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앞서가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진영은 당연히 즉각적 반발에 나섰다. 언론이 이재명계로 분류한 초선의 민형배 의원은 경선일정 조정은 대선패배와 정권상실을 자초할 뿐이라며 대통령 선거일 180일 이전에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고 규정한 기존의 당헌당규에 의거해 오는 9월에 예정대로 경선을 치를 것을 촉구했다.
원론적으로는 이재명 지사 측의 말이 옳다. 더군다나 더불어민주당은 이낙연 전 대표 주도 아래 무리하게 당헌당규를 개정해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자를 공천했다가 야당에게 참패하는 바람에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말 권력누수(Lame Duck) 현상만 오히려 더 가속화시키는 치명적 자충수를 이미 둔 바가 있다.
허나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했다. 오늘 당헌당규에 손댔다가 쫄딱 망했다고 해서, 내일도 거덜이 나리란 법은 없다. 근본적이고 구조적 측면에서는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로 당을 영도하던 시절과는 달리 더는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이 아니다. 친노와 친문의 당이다. 친노와 친문의 당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겠다고 결심한 인물들은 오래전에 탈당이나 정계은퇴의 형식으로 당을 떠났다.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에 머물고 있는 인사들은 이 정당이 친노의 당이고, 친문의 당이란 사실을 자의건 타의건 기본값(Default)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당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는 “엿장수 맘대로”라는 속담이 있다. 엿장수의 기분과 변덕에 따라 같은 돈이라도 손님에게 주는 엿의 크기가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얘기다. 그렇다면 객관적 원칙도, 보편적 기준도 전무한 엿장수의 자의적 횡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물론 있다. 엿 대신 과자나 사탕을 사먹으면 된다. 또는 조금 귀찮을지언정 본인이 직접 집에서 엿을 고아먹는 대안도 있다. 즉 손님에게 얼마만큼의 엿을 가위로 잘라줄까 정하는 건 전적으로 엿장수의 양보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란 뜻이다.
즉 친문은 엿장수이다. 이재명 지사에게는 과자를 사먹을 기회도 있었고, 사탕을 사먹을 기회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엿을 만들어 먹을 기회도 있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다양한 선택지가 아직까지 건재하던 상황을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어법을 빌려 ‘이재명판 별의 순간’으로 형용하련다.
이재명은 이 모든 금쪽같은 기회들을 마다한 채 기어이 엿만 사먹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말았다.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상호를 달고서 여의도에서 영업하는 엿가게의 주인이 친문세력임은 대한민국에서 삼척동자조차 아는 일이다. 언제, 얼마만큼의 엿을 이재명에게 내줄지가 오롯이 친문들의 마음대로인 까닭이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리그, M-리그
당명에 ‘민주당’이 들어간 정당에서는 역대로 경선 과정에서 별의별 해괴한 사건이 다 발생했더랬다. 현직 대통령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통령 후보 경선의 경선인단으로 등록되는 소동도 있었고, 심지어 당대표를 뽑는 투표가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유권자 역할을 하는 대의원이 마치 맥줏집 안주의 일종인 골뱅이무침의 사리처럼 추가되는 사태도 있었다. 공당이 골뱅이로 변신하고, 대의원이 사리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하고 엽기적인 순간이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전에서 종횡무진 맹활약하는 것으로 현실정치권에서의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선거판에서 볼 꼴, 못 볼 꼴 전부 본 셈이다. 이토록 산전수전 다 겪은 이재명이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정한 경선이 이뤄지리라고 순진하게 믿었다면 그야말로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할 노릇이리라.
경선 연기를 요구한 정치인들 가운데에는 김두관 의원도 포함돼 있다. 김두관은 이재명과 비교하면 더불어민주당의 주류에 훨씬 더 가까운 인물이다. 주류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진짜 주류에 해당하는 이낙연 전 대표와 정세균 전 국무총리, 그리고 이광재 의원도 경선일정 연기가 좋으면 좋았지 싫지는 않은 기색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을 프로스포츠의 리그에 비유하면 이곳에는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사무국이 없다는 점이다. 이재명 지사 입장에서는 경쟁구단의 행정요원들이 리그의 사무국 직원도 겸업한 양상이다. 이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해괴하고 편파적인 리그 운영 행태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지사는 여태껏 여기에 특별한 문제제기를 해오지 않았다. 그는 경쟁팀 프런트가 리그의 운영마저 좌지우지하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이상한 리그에서 과감하게 탈퇴하는 역사적 결단을 마냥 미적대기만 하다가 끝내 내리지 못했다.
이재명 지사가 내세우는 핵심적 강점은 압도적인 본선 경쟁력이다. 그러나 9월에 경선을 하면 이기고, 그로부터 고작 석 달 후인 12월에 경선을 하면 질지도 모르는 들쭉날쭉한 경기력을 갖고서, 경선보다는 몇 배는 험하고 치열할 본선의 난관을 과연 성공적으로 돌파할 수 있을지 필자로서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이를테면 레알 마드리드는 여름에도 강팀이고, 겨울에도 강팀이기에 진정한 강팀이다. 참다운 강팀은 봄에는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갔다가 가을이 되면 내년 시즌을 기약해야만 하는 DTD의 법칙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지 않는다. 내려갈 팀은 내려가듯이, 올라갈 팀은 올라가기 마련이다. ‘팀 이재명’은 영원한 우승후보 레알 마드리드인가? 아니면 암흑기의 LG 트윈스인가?
이재명 지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잔인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제는 경선을 치르는 도중에 어떠한 수모와 불이익을 당해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오로지 실력으로 극복해야만 할 때이다. 엉터리 엿장수에게 엿을 사먹기로 한 것도, 경쟁팀 프런트가 리그 사무국을 겸하는 엽기 리그에 잔류하기로 한 것도 결국에는 이재명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재명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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