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테미스토클레스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손님들을 접대하는 연회를 쉬지 않고 벌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는 데 쓰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심지어 공공연한 공갈협박마저 서슴지 않았다. 필리데스는 말을 키우는 조련사였는데, 테미스토클레스가 점찍은 망아지를 내어주지 않다가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당신 식구들까지 담가바리겠다”는 살벌한 협박을 들어야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유명해지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명문가 자제인 키몬을 상대로 누가 더 손님을 호화롭게 대접하는지를 경쟁했다가 세간의 빈축을 샀다고 기록하였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국이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테미스토클레스는 추호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수단방법 구분하지 않고서 목돈을 모아 연극을 후원했고, 그가 제작자로 참여한 비극이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연극제에서 드디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아테네에서 연극 경연은 단순한 예술의 향연이 아니었다. 개인의 영광과 집단의 위세를 뽐내는 무혈의 전쟁터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돈을 물 쓰듯 하며 사치와 방탕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이와 정비례해 평민들 사이에서의 그의 인기는 연일 상종가를 때렸다. 그가 인기를 얻은 비결은 단지 사람들에게 주지육림을 만끽시켜준 덕분만은 아니었다. 공직자로서의 테미스토클레스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중재자로서 평판이 높았다. 케오스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가 어떤 재판과 관련해 부적절한 부탁을 해오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좋은 시인은 운율을 지켜야 하고, 좋은 판관은 중립을 지켜야 하오”라고 이야기하며 일언지하에 청탁을 거절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청렴하기로 소문난 아리스테이데스를 도편추방하는 데 성공한 것은 신뢰라는 이름의 ‘무형의 사회적 자본’을 알차게 축적해온 때문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예상한 페르시아 제국의 두 번째 그리스 침공이 마침내 본격화되었다.
페르시아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 아테네군의 총사령관 직책을 담당하는 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누군가 해야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이 돼버렸다. 그러자 귀족 출신의 에피키데스가 군권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는 말은 번지르르하나 실력은 형편없는 전형적인 강남좌파형 속물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내로남불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물에게 전쟁 지휘를 맡겼다가는 나라가 결딴날 게 빤함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서 에피키데스의 약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에피키데스는 돈에 약했던 것이다. 뇌물을 두둑이 받고서 마음이 한껏 만족스러워진 에피키데스는 마치 조국을 위해 큰 결단이나 한 듯이 사령관직을 고사하겠다고 거취를 표명했다. 그런 에피키데스의 한심하고 위선적인 꼬락서니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테미스토클레스는 며칠 전에 먹은 음식물이 목구멍을 타고서 다시 넘어오는 것 같은 지독한 욕지기를 느꼈다.
그러므로 크세르크세스가 파견한 페르시아 사절단의 통역관으로 적국에 부역한 그리스인을 테미스토클레스가 동포를 배신한 반역죄를 물어 사형해 처한 조치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국 영화 「300」을 본 사람이라면 예속의 표시로 흙과 물을 요구하는 페르시아 사자 일행을 스파르타 국왕 레오니다스가 인정사정없이 참살하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바로 그 광경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실화였던 셈이다.
젤레이아 태생의 아르트미오스는 따라서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황금을 바치며 화평을 종용하는 아르트미오스에게는 그와 그의 가족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처벌을 내렸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확고한 항전결의와 불굴의 저항의지는 그리스인들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접착제가 되었다. 그리스 세계는 지루하게 이어져온 해묵은 내전을 그치고 제국과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일전을 맞이할 태세와 준비를 착착 갖춰나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주화론을 제압하는 성과는 거두었으나, 새로 건조한 삼단노선들에 의지해 해상에서 회심의 결전을 치르도록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마라톤 평야의 기적의 승전보를 여전히 낭만적으로 추억해온 대다수 아테네인들은 지상전으로 전쟁의 결판을 내자는 입장을 고집했다.
대책은 일단 해보는 것뿐이었다. 해봤는데도 안 되면 인간의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라케다이몬이 파병한 병력이 포함된 대규모 지상군을 이끌고 템페 계곡을 향해 북상했다. 페르시아의 직접적 손길이 아직은 미치지 않은 테살리아 지방을 방비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전과 없이 이내 군사를 뒤로 물려야만 했고, 그리스 육군의 전력이 변변찮음을 목격한 테살리아 주민들은 페르시아 편에 붙고 말았다.
테살리아가 페르시아 수중에 허망하게 함락되자 인접한 보이오티아 지역도 곧바로 제국에 백기를 들었다. 아테네인들은 이러한 연쇄적인 도미노 현상을 중단시킬 수 있는 최종적 방어막은 오직 바다뿐이란 사실을 그제야 마지못해 인정하였고, 테미스토클레스는 함대의 주력을 즉각 아르테미시온 방면으로 이동시켜 해협을 물샐 틈 없이 봉쇄하도록 했다. 아르테미시온은 테르모필레 가까이 위치한 곳으로 이곳의 물길을 단단히 틀어쥠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기본 전략인 수륙 양면의 병진 작전을 좌절시키는 게 테미스토클레스가 오래전 야인 시절부터 머릿속에서 그려온 작전구상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에 단연 제일 많은 병력과 선박을 제공한 나라는 아테네였다. 동맹을 지속시키려면 전통의 라이벌인 스파르타에게 군대의 작전지휘권을 양보해야만 했다. 병사들이 다른 나라 장군, 그것도 스파르타 국적 장수의 지휘를 자존심이 너무나 상해서 도저히 받지 못하겠다고 버티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고 부하들을 다독였다.
그는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전쟁이 승리로 끝난 다음 모든 그리스인들이 아테네에게 기꺼이 자발적으로 신복해올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적국을 용기로 압도하고 동맹군을 아량에서 능가하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여 달라고 휘하의 장병들을 설득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간절한 호소에 감복한 아테네 군사들은 그리스 연합군의 총수 자리에 추대된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다.
스파르타의 불패의 무적신화는 기실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스파르타군은 임전무퇴의 씩씩하고 당당한 면모만 시종일관 과시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전장은 라케다이몬인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푸른 바다였다. 에우리비아데스는 야만인 부대, 즉 페르시아 군대의 엄청난 규모를 실제로 대면하자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눈앞에 출현한 강력한 적선들이 페르시아 함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또 다른 2백 천의 중무장한 전함이 그리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접근해오는 중이었다.
중과부적의 상황에 당황한 에우리비아데스는 해전으로는 전연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본국으로 빨리 돌아가 지상병력을 추가로 증원받으려 했다. 그리스 연합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 에우보이아 섬은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게 될 터였다. 다급해진 에우보이아 인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뒷돈을 챙겨주며 제발 자신들을 버리지 말라고 읍소하다시피 하며 매달렸다. 역사학의 비조로 통하는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돈을 고스란히 에우리비아데스에게 상납했다고 말했다. 에우리비아데스를 공범관계로 만들어 자기의 통제 하에 묶어두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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