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미스토클레스가 소년티를 벗고 청년기 즉 ‘젊은 어른’의 단계에 진입했을 무렵은 아테네 역사의 격동기였다. 머리 좋고 가난한 청년이 물고기라면, 질풍노도의 사회적 변혁기는 물이다. 물을 만난 물고기가 얌전히 있을 리 만무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등용문을 향해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득권층에게 쌓인 감정이 많았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아테네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가 테미스토클레스의 적개심을 산 계급적 배경이다.
두 사람은 출신성분만큼이나 성격도 정반대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과격하고 선동적이었지만, 아리스테이데스는 온화하면서도 논리와 이성을 중시했다. 정치에 입문한 동기 역시 천양지차였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공동체의 존립과 질서유지에 이바지하고자 정치에 뛰어들었다. 정치를 통해 입신양명의 꿈을 성취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반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라의 개혁과 개인의 성공을 동일시했다. 그가 출세하려면 나라가 개혁되어야 했고, 나라가 개혁되려면 그가 출세해야만 했다.
참여정부 초기에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과격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국가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진정성 있는 노력을 차분하고 착실하게 기울이기보다는, ‘개혁가’라는 상징가치와 그에 수반될 명예와 권력을 탐내는 데만 집요하게 열중하는 유시민 부류의 얄팍하고 정략적인 기회주의적 행태를 꼬집은 일침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테미스토클레스도 과격 상업주의자,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개혁 장사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정적과의 통 큰 타협에 나서는 용단은 물론이고 자신이 어렵게 획득한 권능과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려는 결심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망국적 진영논리를 끊임없이 부추기면서, 방송과 출판 그리고 유튜브 등 그때그때 잘나가는 분야들만 방물장수처럼 차례차례로 기웃거리며 팔색조 같이 현란한 변신을 거듭해온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유시민 사이에는 이외의 다른 공통점도 더러 있었다. 본인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그랬다. 유시민의 주된 공격 표적은 같은 진영, 동일 정당 안에서 자기와 비교해 인기가 있거나 또는 명망이 높은 경쟁자들이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전자의 범주에 해당한다면,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시샘의 대상은 유시민의 희생양들과는 결을 달리했다. 그는 그리스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인물을 투기했다. 그가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건 밀티아데스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전승비 때문이었다. 해당 승전비는 마라톤 평야에서 다리우스 대왕의 페르시아 침략군을 격파하고 건립한 기념물이었다. 그는 헬라스, 곧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이 진짜로 끝났으면 그가 공을 세울 기회도 더는 없는 탓이었다.
은광은 고대의 유전이었다. 은이 금과 더불어 보편적 결제수단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에서였다. 더욱이 은은 구하기 힘든 금과 다르게 실용성도 많았으므로 현실생활에서의 쓰임새 또한 좋았다.
라우레이온에 자리한 은광은 아테네 최대 은광으로 아테네인들은 이곳에서 채굴된 은을 판매해 조성된 수익금을 종전에는 그냥 나눠 갖기만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분배되는 즉시 생활비로 지출되거나 유흥비로 탕진되어온 라우레이온 은광의 수입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를 대표하는 전함인 삼단노선을 추가로 건조하자는 파격적 제안을 내놨다.
이미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차츰차츰 망각돼가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군함을 만들자고 말했다면 그는 인민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기는커녕 되레 반감만 샀을 게 틀림없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장기적 청사진은 일단 서랍장 속에 깊숙이 넣어둔 다음, 시민들에게 현존하고 직접적인 위협으로 체감되는 현안 문제를 먼저 꺼내들었다. 그건 바로 아테네 서쪽에 위치한 아이기나 섬과의 오래된 해상분쟁이었다. 아이기나는 전통의 해상강국으로서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아테네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온 터였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골치 아픈 아이기나 녀석들을 혼내주자고 동을 뜨자 허다한 아테네인들이 즉각적으로 찬의를 표시했고, 그 덕분에 1백 척의 최신예 대형 삼단노선이 이내 진수될 수가 있었다. 이때 새롭게 취역한 함선들은 나중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신규로 함대를 편성한 일은 단순히 해군력을 강화하는 국방정책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아테네의 전략적이고 기본적인 국가발전 방향을 바다로 돌리는 결정적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역설했다는 점에서 알프레드 마한(Alfred Thayer Mahan, 1840년~1914년) 제독 같은 대양 해군론자들의 원조였다.
국력을 해양력 건설에 쏟아 부은 국책은 뭍에서 잔뼈가 굵은 보수주의자들의 신경을 긁어놓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밀티아데스 추종자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육지가 개인기의 공간이라면, 바다는 조직력의 무대다. 따라서 바다는 선박의 승조원들에게 수평적이고 동지적인 민주적 사고를 요구한다. 해군이 자유주의 사상의 산실로 각광받아온 까닭이다.
민주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던 플라톤이 “테미스토클레스가 창과 방패를 들고서 땅위에서 굳건히 버텨온 용감한 아테네 시민들을 방석 위에 얌전하게 앉아 노나 젓게 만들었다”고 개탄했던 근본적 원인은 아테네가 평범한 육상국가에서 위대한 해상제국으로 변화하는 사태와 조응해 정치체제가 귀족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 바뀐 데 있었다. 「알키비아데스 편」에서 선명히 확인했듯, 아테네식의 직접 민주주의는 종국에는 부패하고 무책임한 우중정치로 타락해 국가 자체의 파멸을 부르고 말았다.
한데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해석일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을 수용해 아테네가 해군력을 대폭 증강한 것은 절묘하기 짝이 없는 신의 한 수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파죽지세의 맹렬한 기세로 그리스로 쳐들어온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 대병은 아테네를 함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해전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본국으로 황급히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주력을 궤멸시킨 아테네 해군이 소아시아 반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부교를 기습적으로 끊어놓으면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군사들이 졸지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후위의 분견대로 잔류시킨 마르도니오스 별동대의 실제 목표는 그리스 정복이 아니었다. 본대의 안전한 후퇴를 보장하는 일종의 총알받이였다.
사석작전에서의 사석 용도로 남은 마로도니오스의 부대를 물리치려고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주축이 된 연합군을 긴급히 꾸려야 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살라미스 해전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와 성격의 유럽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할리우드 영화 「300」에 온몸에 피어싱을 한 기괴한 형상으로 등장하는, 철학적 용어로 “낯선 타자”는 크세르크세스가 아닌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나 혹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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