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3인의 회동은 삼두정치 반대파로부터 즉각적인 불신과 의혹을 샀다. 원로원 의원 마르켈루스는 로마로 돌아온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에게 집정관 선거에 나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오만한 태도로, 크라수스는 능글맞은 처세로 마르켈루스의 질문을 피해갔다.
두 사람이 집정관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자 다른 후보자들은 승산이 희박하다는 판단 아래 앞 다투어 후보직을 사퇴했다. 단, 도미티우스만은 예외였다. 동지이자 친척인 카토가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는 신성한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선거 완주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우스의 출마 강행은 삼두정치를 비판해온 인사들의 용기와 투지를 북돋았다. 그들은 도미티우스가 광장에 나타나자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큰소리로 맹렬히 비난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하고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물리력을 동원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정치공작에 필적할 ‘로마판 용팔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주를 받은 정치깡패들은 새벽부터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던 도미티우스 일행을 습격해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에서 후보자를 수행해 함께 유세 중이던 카토도 부상을 입었다.
완력으로 도미티우스를 주저앉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자신들이 집정관에 당선됐음을 선포하고서는 로마의 영토를 제멋대로 나눠가졌다. 크라수스는 시리아의 지배권을 차지했고, 폼페이우스는 이베리아를 본인 몫으로 챙겼다. 양인을 지원한 카이사르는 그 보상으로 갈리아 지역을 5년간 더 통치하게 됐다.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간의 세력권 분배가 제비뽑기의 결과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전에 작성된 각본에 따른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크라수스는 수백 년 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저 머나먼 인도와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오래전부터 흉중에 품어온 터였고, 야심을 실천에 옮기려면 나라의 서쪽 지방을 무조건 근거지로 삼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로마 최고의 건설업자 크라수스가 인생 2모작의 터전을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에서 구한 사태와 비교하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대권도전 결정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 선택이었다. 이는 크라수스의 동방원정의 꿈이 그만큼 무모하고 뜬금없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성공한 인물들은 한 가지 일에 미치면 헤어나기 어려운 성격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좋게 표현해 집중력이고, 나쁜 말로 광기이다. 크라수스의 사례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했다.
동쪽의 내로라하는 열방들을 차례로 석권하겠다는 목표를 일단 세우자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스스로의 성격부터 개조하는 일이었다. 크라수스는 신중하고 치밀한 장사꾼 기질을 미련 없이 버리고 담대하고 활달한 영웅적 면모의 군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는 하지 않던 허장성세를 수시로 부림으로써 주변을 싸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크라수스의 원정 계획에 제일 먼저 전폭적 지지 의사를 표명한 사람은 카이사르였다. 명민한 전략가이자 냉철한 승부사인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의 황당무계한 동방 경략 구상이 참담한 실패로 귀결될 게 빤함을 모를 리 없었다. 영악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차도살인의 음흉한 속셈을 띠고 정적의 맹목적 폭주를 부추겼다.
크라수스의 계획이 실패하면 크라수스 혼자만 사막의 고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원정을 떠난 수많은 시민들도 불귀의 객이 될 게 명백했다. 민중호민관 아테이우스는 이제껏 로마와 별다른 불협화음을 빚지 않아온 파르티아를 괜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며 크라수스의 계획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다. 아테이우스의 주장에 동조한 다수의 시민들이 크라수스를 에워싸고서 격렬한 반전 시위를 전개했다.
크라수스는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를 무찌르겠다고 공개적으로 기염을 토해놓은 마당이었다. 그런 크라수스가 시위대의 기세가 두려워 폼페이우스에게 다급히 구원을 청한 것 자체부터가 해괴하고 엽기적인 코미디였다. 도움 요청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가 도시 바깥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인파 사이에 직접 길을 터주었다.
아테이우스는 집요했다. 그는 파르티아와의 승률 낮은 전쟁에서 무수한 로마인들이 애꿎게 생명을 잃을 것이라면서 크라수스를 붙잡고 늘어졌다. 논리적 설득으로는 도저히 만류가 되지 않자 아테이우스는 호민관으로서의 정당한 권한을 발동시켜 크라수스를 체포하려 시도했다.
동료 호민관들의 방해 탓에 검거가 무산되자 그는 크라수스가 통과하려는 성문 앞에 서서 지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혼란스럽고 격변하는 하수상한 시국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흉흉해질 대로 흉흉해진 로마의 민심은 호민관이 집정관에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린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겹치면서 무겁고 음산한 공포감의 심연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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