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남경우 : 오늘날 격변하는 국제정세의 핵심은 미국의 일극 체제가 무너져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올해인 2020년 4월 17일, 미국 공군이 그동안 서태평양의 괌 섬에 배치해온 B-52H 전략폭격기 5대를 미 본토로 돌연 철수시켰습니다. 미국령인 괌 섬은 한국과 일본에 주둔한 여러 개의 미군 기지들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이곳 공군기지에서 이착륙하는 폭격기들은 미군의 매우 중요한 전략자산입니다. 이 긴요한 항공기들을 트럼프 행정부가 본국으로 도로 물린 것입니다. 괌에서 철수한 군사력을 대체할 후속 전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국에서 특별히 언급된 내용이 없습니다. 미국이 괌에서 폭격기들을 본토로 철수시키자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제공해온 핵우산에 구멍이 날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불안감이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영향력 퇴조가 현저하게 체감되는 영역은 단지 군사 부문만이 아닙니다. 경제와 통상 분야에서도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는 추세가 뚜렷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달러화는 브레튼 우즈 체제에 입각해 2차 대전 이후로 전 세계의 기축통화로 줄곧 군림해왔습니다. 최근에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의 위상에 균열이 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달러화는 원유의 국제시장 거래에서의 결제수단으로서 독보적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이 페트로 달러(Petro Dollar)의 위치가 지금 심각하게 동요하는 중입니다. 원유 가격이 일정한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달러 이외의 결제수단으로 석유 대금을 지불하겠다는 나라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중국과 러시아의 주도로 2001년 5월 발족한 상하이 협력기구(SCO : 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에 가맹한 국가들입니다. SCO의 출범과 더불어 중국과 러시아는 달러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본격적으로 공동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각국 사이에 더욱더 빈번히 체결되는 통화교환협정(Currency Swap)은 구태여 달러화를 매개로 거치지 않아도 원활히 작동하는 국제통화시스템의 출현을 촉진해왔습니다. 달러화는 과거 전 세계 무역 결제액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막강한 위력을 뽐냈습니다. 현재는 이 비율이 70프로 밑으로 떨어진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전통적 친미국가 터키 너마저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양 날개로 삼아 확고부동한 패권을 장기간 장악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시리아에서 미군이 철수하기로 결정한 데에서 보이듯 미국은 동아시아에 이어 중동에서도 서둘러 발을 빼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중동에서 미국 패권체제가 종식돼가는 분위기는 이라크 의회가 이라크 영내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일로 다시금 확인되었습니다.
터키는 유럽국가가 아님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회원국으로 가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역대 터키 정부가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자본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군말 없이 순순히 담당해왔기 때문입니다. 사우디나 이스라엘 못잖은 중근동 지역의 전통적인 친미국가였던 터키마저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반미의 깃발을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우리는 하나의 유럽을 목표로 출범한 유럽연합(EU)이 현재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현실을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쉥겐조약은 유럽연합에 가입한 국가들 간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자유롭게 보장하자는 취지로 체결된 조약입니다. 지구촌을 창궐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이 쉥겐조약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면서 유럽연합의 존재의 이유 자체까지도 치명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동의 복잡다단한 분쟁들과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분열지향적인 흐름이 세계가 미국 주도의 일극 시대로부터 특정한 구심점이 부재한 다극화 시대로 본격적으로 이행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저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체제의 붕괴는 이와 같은 다극화 추세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관건은 21세기 세계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어떻게 새로운 국가적 진로와 좌표를 설정하느냐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가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책임지는 고위직 관료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에 기초해 나라 안팎의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식의 한계와 인식의 제약으로 인해 남북관계에서는 멋들어진 선언과 화려한 발표는 무성한데, 과감한 실천과 성의 있는 행동은 실종된 답답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외교적 현안들과 한반도 문제에서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상황이 문재인 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깊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한국에 진보정권이 들어섰다는 정세분석에 흔쾌히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국제사회의 대북정책은 결국은 유엔의 대북경제제재로 구체화돼왔습니다. 대북제재가 미국의 주도적 드라이브 하에 실행돼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을 집요하게 압박해온 국제사회의 일치된 대북공조에 조금씩 엇박자와 파열음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게 그 증거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진심으로 바라는 국가가 우리 주변에 단 하나도 없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엄중하게 직시해야만 합니다. 남북한의 평화로운 재통합을 일본이 원하겠습니까, 중국이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미국이나 러시아가 바라겠습니까? 그들 모두 내심으로는 남북이 대치하고 대결하는 분단구조가 변함없이 무한정 지속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북한이 뜻과 힘을 모아 한반도의 현상 변경에 필요한 동력을 창출하고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차대한 민족사적 과제를 문재인 정부는 더는 피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편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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