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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장훈 회고록 ① - 1987년의 ‘8인 정치회의’를 아시나요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5-09-06 1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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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마다 발에 차이는 게 정치인들이 급조해 내놓는 각종 회고록과 자서전이다. 이토록 정치인들의 회고록과 자서전이 차고 넘치는 나라에서 정치학자들의 개인적 경험과 소회가 담긴 책들은 서점가에서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지극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어서일까?

그건 아닐 테다. 우리나라 정치학자들이 물밑에서는 여의도 정치권에서 마당발로 유명한 내로라하는 직업 정치인들 버금가게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음은 정치학계에서는 비밀 아닌 비밀인 탓이다.

정통 정치학자인 장훈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는 양지에서는 너무나 멀고, 음지에서는 너무나 가까운 정치와 정치학자의 거리를 상식과 균형에 걸맞게 조정해야만 한다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오래전부터 품어온 터였다. 정치와 정치학자의 거리를 적정하게 설정하려는 장훈 교수의 노력은 그가 올여름에 홍희경 작가와 공희준 정치 컨털턴트와 함께 진행한 3인 대담으로 가시적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대담 내용의 일부분을 팍스뉴스에 ‘미리보기’ 형식으로 총 네 번에 걸쳐서 활자화하는 바이다.

김영삼과 김대중, 전두환 정권의 6개월 연장에 동의하다


‘8인 정치회의’가 미증유의 합의 개헌을 이뤄냈다면, 「장훈 회고록」은 논문과 학술서적 속에 익명 아닌 익명으로 숨어 있던 한국의 정치학자들에게도 인간의 얼굴이 있음을 보여주는 유례없는 책일 될지 모른다. 사진은 왼쪽부터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 홍희경 작가, 공희준 정치 컨설턴트

공희준(이하 공) :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습니다. 아울러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야당 정치인들이 오랜 탄압과 박해에서 벗어나 제도권 정치의 전면에 다시금 등장했습니다. 군부의 퇴조와 민간 정치 세력의 약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장훈 (이하 장) : 한국 민주화의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정치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저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당 정치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기 때문에 6월 항쟁이 벌어지던 무렵에는 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심층적 연구를 아쉽게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에 비로소 심도 깊은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국내외 학자들이 발표한 다양한 문헌들을 살펴봤는데 저는 당시 진보 진영의 주류적 시각과는 다소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87년의 민주화가 지극히 제한적 민주화라는 것이 그즈음 진보 진영의 주류적 시각이었습니다.


공 : 진보의 주류는 어떤 이유에서 87년의 민주화를 지극히 제한적인 민주화로 여기게 됐나요?


장 : 1987년 12월에 실시된 제13대 대선에서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당선된 사실이 그와 같은 시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조 쿠데타 세력의 일원인 김종필이 그해 대선에서 얻은 표수를 노태우의 득표수에 합산하면 총투표수의 45퍼센트 정도에 육박했습니다. 민주화 세력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6 선언을 발표한 이후 넥타이 부대의 대부분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시 펜대를 잡았습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의 중산층이 생업현장으로 복귀하면서 시위 열기도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치의 중심이 길거리에서 협상 테이블로 이동하게 됐습니다. ‘8인 정치회의’가 출범했기 때문입니다. 노태우의 여당에서 4명이 참여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당에서 역시 4명이 참여해 총 8명으로 구성된 회의체였습니다.


공 : 그곳에서 개헌 협상이 진행됐나요?


장 : 헌법 개정을 비롯한 중요한 정치 일정이 8인 회의에서 논의·결정됐습니다. 8인 회의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대선이 치러지는 1987년 연말까지의 정치 질서를 전두환이 관리하는 데 대한 암묵적 양해가 이뤄진 것입니다. 1987년 무렵의 민주화 세력은 아주 다양한 참여자들로 구성됐습니다. 따라서 양김이 전두환 정권이 그해 연말까지 유지되는 데 동의하자 학생운동권과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은 결국은 YS와 DJ의 양김이었습니다. YS와 DJ가 전두환 정권이 국가권력을 잠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동의했으니 학생들과 재야는 양김이 주도하는 민주화로의 이행 작업이 근본적 한계에 직면했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계로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민주화 투쟁에 동력을 제공하는 엔진 역할을 맡아온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세력과 군부 권위주의 세력 사이에 힘의 균형상태, 즉 교착상태가 발생하자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이 민주화 세력 쪽으로 힘이 쏠리도록 일종의 캐스팅보트 구실을 했습니다. 이 넥타이 부대는 학생운동권이나 재야세력과 달리 군부의 즉각적 퇴진 같은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변화까지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부활과 김대중의 정치적 해금 같은 일들이 민주화 운동 진영과 중산층 유권자들 간의 현실적인 최대 공약수였습니다. 최장집 선생 같은 분들은 1987년의 국면에서 이 최대 공약수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일에 대한 오랫동안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공 : 전두환 정권이 6월에 끝나지 않고, 대선이 있던 12월까지 사실상 유지된 것도 그러한 최대 공약수의 부산물일 수 있겠네요.


장 : 그러한 수준에서 타협과 절충이 이뤄진 셈입니다.


공 : 절차적 민주주의의 외관을 두른 절충적 민주주의로 생각됩니다.


장 : 제한적 민주주의(Limited Democracy)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겠죠. 역설적 사실은 제한적 민주주의로 출발한 나라들의 상당수가 이후 정치안정과 경제성장 같은 과제들을 오히려 더 성공적으로 실현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루마니아처럼 기성 체제를 화끈하게 때려 부순 나라는 되레 침체와 답보를 거듭했습니다.


공 : 체코가 느리고 더디게 체제 변동을 이뤄냈다면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부부를 즉결처형한 사건에서 보듯이 전광석화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체코의 길과 루마니아의 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는지 이미 판단이 내려진 분위기입니다.


장 : 중부유럽에서는 체코가, 중남미에서는 브라질이 한국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습니다. 반대로, 아시아의 필리핀은 그야말로 확 갈아엎는 선택을 되풀이해왔습니다.


공 : 필리핀은 가히 영구혁명을 연상시킬 정도로 끝없이 갈아엎었음에도 독재자 마르코스와 부정부패의 화신 이멜다 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돌고 돌아 대통령이 됐습니다.


장 : 그 나라가 본래 정치적 토대와 경제적 기반이 얼마나 튼튼했는지가 민주주의의 지속적 안정과 활력 있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이와 동시에 민주화의 전개 양상 또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적잖은 식자들이 민주화의 전환 방식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끼치는 영향력을 간과하곤 했습니다.


공 : YS와 DJ는 그해 겨울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의 권력이 반년가량 연장되는 일에 동의한 게 아닐까요?


장 :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저는 미국이 민주화 세력과 군부 세력이 6개월간의 과도적 완충기에 합의하는 데 적잖은 작용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 :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유무형의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이 훗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DJ의 경우에는 미국 안에 만만찮은 인맥을 구축하기도 했고요.


장 :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더욱이 이희호 여사는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했었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1987년에 미국이 한국에서 했던 역할에 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와 관련된 새로운 문서들도 계속 공개·발굴될 테고요.


공 : 미국이 87년 하반기에 한국의 과도기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보증인 역할을 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한국 사회의 동향으로 초점을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넥타이 부대가 사라지자 곧이어 19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변혁의 주체가 화이트 칼라 사무직에서 블루 칼라 생산직으로 바뀌는 듯싶은 구도였습니다.


장 : 한국 사회에서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현대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여야가 전두환 정권의 시한부 지속에 합의한 현실정치의 지형을 당장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8인 정치회의가 ‘평화적인 합의 개헌’을 이뤄내


공 : 제가 이듬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가에서는 직전 해에 전개된 노동자 대투쟁의 의의를 굉장히 높고 크게 평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제가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왜 6월까지는 비교적 잠잠히 있다가 7월에 되어서야 거리로 나왔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지식인들은 화이트 칼라를 기회주의적 성향이라고 성토하는데, 노태우가 비록 조건부이기는 했을지언정 항복을 선언한 다음에 투쟁을 시작한 블루 칼라들이 외려 더 기회주의적이지 않느냐 하는 개 그때 제가 품었던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선배들 눈치 보느라 차마 입 밖으로 발설하지는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장 : 6월에도 블루 칼라들은 투쟁의 대열에 동참해 있었습니다. 다만 화이트 칼라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관심과 조명을 받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1989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성과 없이 끝난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새로 개정되는 헌법의 노동관계 조항들은 그 흔적과 영향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YS와 DJ 중에서는 후자가 더 진보적이고 노동자 친화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노동계는 자신들의 요구를 상도동보다는 동교동으로 많이 가져갔는데, DJ는 그들이 요구 사항을 전부 수용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한 김대중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비판적 지지자로 남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공 : 선명한 민중 후보를 표방한 백기완 후보를 지지하는 쪽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홍희경(이하 홍) : 사무직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일터로 되돌아간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장 : 6·29 선언이 사무직들을 회군시킨 핵심적 요인으로 보입니다. 그전까지는 전두환이 7년 전인 1980년도처럼 군대를 동원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시중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6월 29일은 1980년의 전두환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국민에게 주었습니다. 6월 29일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동안 한국정치를 시계 제로 상태에 몰아넣던 불투명한 요인들이 정리가 됐습니다. 정치의 예측가능성이 크게 올라갔습니다.


공 : 어떤 중요한 사안들이 확정됐나요?


장 : 크게 세 가지만 말씀드리면 첫째는 김대중의 완전한 법률적 복권이었습니다. 둘째는 대통령 직선제 부활이었습니다. 셋째는 연내에 대선이 치러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일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된 ‘8인 정치회의’의 출범이었습니다.


공 : 회의의 주요 구성원들로는 어떤 분들이 계셨나요?


장 :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이중재 신민당 부총재였습니다.


공 : 이중재 부총재가 야당에서는 보기 드문 경제통으로 언론에 보도된 게 저도 희미하게나마 기억납니다.


장 : 이종구 전 의원이 이중재 부총재의 아들입니다. 제가 생전의 이중재 부총재를 만나서 8인 정치회의에 관한 말씀을 몇 차례 들었습니다. 그는 DJ의 대리인 자격으로 회의의 일원이 됐습니다. 8인 정치회의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시해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포함한 여러 정치 관계법들까지 전방위로 다뤘습니다. 헌법재판소 부활도 이 회의에서 최종 결정됐습니다. 현행 헌법에 들어간 주요한 내용의 거의 전부가 여기에서 논의되고 정리됐습니다.

공 : 그 8명이 대한민국 헌법 제8차 개정안, 곧 소위 87년 체제의 기초자들이네요. 미국에서 말하는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요. 그럼에도 8인 정치회의에 대한 체계적 연구작업이 사실상 전무한 현상이 참 이상합니다.


장 : 학계와 언론 모두가 게으른 탓입니다. 발로 뛰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취재하고 연구하려고만 합니다. 지금은 시사저널 발행인으로 있는 전영기 중앙일보 전 논설위원 정도만이 8인 정치회의의 역할을 심층적으로 취재한 바가 있습니다.


공 :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우리가 진짜 중요한 것들을 너무나 무신경하게 흘려보냈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듭니다. 8인 정치회의가 현재 보수가 즐겨 찾는 국가조찬기도회나 진보가 때만 되면 의지하는 원탁회의와 견주어 우리 사회의 발전에 훨씬 더 의미 있고 긍정적인 발자취를 남겼으니까요. 그런데 영원한 비대위원장 김종인 위원장의 회고록인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보면 자기가 87년 헌법을 다 만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홍 : 실제로는 명왕성인데 스스로는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이라고 주장하는 격입니다.


공 :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이든지 자아가 비대해야만 직업 정치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홍 : 저는 여기에서 심각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무모하게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지 않고 야당에 8인 정치회의 같은 국정운영 협의체를 진정성을 갖고서 제안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한 포용적이고 통합적인 국정운영을 했다면 지금처럼 비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장 : 윤 전 대통령에게 그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공 : 2025년판 8인 정치회의의 멤버로 김건희도 포함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으면 윤석열이 이를 백 퍼센트 수용했을 것 같습니다. (②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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