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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했던 이재명, 출근했던 임종석 - 계급정당은 싫고 진보정당은 좋다는 분들에게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5-02-21 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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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관악상고와 서대문여상이 있었으니


나이 서른에 계급정당을 포기하고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기득권 86 세대 정치인들이 나이 환갑에 이르러 진보정당을 지키자고 외치는 건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사진은 더불어민주당 정체성 논쟁의 주역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대한민국의 대학교들에는 세 가지 유형의 재학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선수 시절의 김연아처럼 학교를 방문하는 학생이다.


김연아가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그가 고려대학교를 방문했다. 슈퍼스타 김연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는 데 여념이 없던 우리나라 언론은 학교를 방문한 김연아가 총장실에서 찻잔을 사이에 두고서 총장과 환담을 나누는 광경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누리꾼들이 곧바로 들고 일어났다. 고려대학교 재학생 신분인 김연아가 학교를 가는 일은 방문이 아닌 출근으로 표현돼야 옳다는 게 많은 누리꾼들의 공통된 지적이었다.


두 번째는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그리고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같은 왕년의 내로라하는 운동권 투사들처럼 학교로 출근하는 학생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무렵에는 웬만한 4년제 종합대들의 경우 총학생회는 물론이고 단과대학교 학생회마다 학생회 사무실이 별도로 설치돼 있었다. 학생회 사무실에선 학생들이 그야말로 각종 사무를 부지런히 처리했다. 그들 입장에서 학교는 등교하는 곳이 아닌 출근하는 곳이었다.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세상의 뿌리 깊은 선입관과는 반대로 일머리와 직무 능력이 발달해 있었다. 왜냐? 사무를 보려면 타자도 배워야 했고, 회계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다양한 학내외 활동과 행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면 다방면으로 영업도 뛰어야만 했다. 남들은 정식으로 취직한 다음에야 회사에서 비로소 배우기 시작하는 실무 역량을 교직원도 아니면서 이들처럼 학교로 출근하는 학생들은 일찌감치 미리 충실하게 터득해뒀던 셈이다.


과거에는 실제 사무실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기술들을 대개는 상업고등학교에서 가르쳐주었다. 비유적으로 형용하자면 운동권 학생들에게 서울대는 관악상고였고, 연세대는 신촌상고였으며, 고려대는 안암상고였다. 서강대는 대흥상고였고, 성균관대는 혜화상고였으며, 한양대는 왕십리상고였다. 여대로 시선을 돌리면 이화여대는 서대문여상이었고, 숙명여대는 청파여상이었다. 내가 나온 대학은 아마 필동상고쯤이 되었으리라.


세 번째는 대다수의 소위 일반 학우들처럼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도 당연히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이었다.


이재명 대표와 박용진 전 의원이 2025년 2월 21일 금요일 낮, 여의도에 소재한 한 음식점에서 오찬을 겸한 양자 회동을 했다는 소식이다. 이 대표와 박 전 의원은 작년 총선 국면에서 비명횡사-친명횡재로 표상되는 공천 갈등으로 말미암아 매우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의 전격적 만남은 서로 간에 쌓였을 감정적 앙금을 해소하고, 조기 대선에 대비해 당력을 결집하려는 의도에서 성사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재명은 박용진에게 당을 위해 더 큰 역할을 해달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했고, 박용진은 민주당의 고질병인 내로남불의 불식과 함께 한국정치의 해묵은 과제일 세대교체에 이재명이 더욱더 노력해 달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젊은 피 수혈에 본격적으로 나선 2000년의 제16대 총선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은 1980년대에 학교로 출근한 인물들이 동시대에 학교로 등교한 사람들이 내면에 품고 있는 미안함의 감정과 부채의식을 끊임없는 자극하고 소환하는 게 당내 정치의 사실상 전부가 돼왔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학교에 출근했던 소수의 학생들과 학교에 등교한 다수의 학생들의 관계는 정치인과 지지자의 관계로부터 악덕 채권자와 순진한 채무자의 관계로 오래전에 변질하고 말았다. 86 세대 정치인들이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고, 장관과 차관이 되고, 공기업 경영진이 되고, 청와대 고위 참모가 되는 과정에서 원금과 이자의 몇 배를 이미 알뜰하게 챙겨간 탓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박용진은 학교에 등교한 학생보다는 학교에 출근한 학생에 가깝다. 그런 박용진 전 의원마저 86세대 청산론을 이재명 대표와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호소했을 지경이면 민주당 안의 고인 물들의 연식이 얼마나 오래됐는지가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으리라.


86 세대, 진보성이 아니라 득표력을 보고 입당해


이재명은 더불어민주당은 중도보수 정당임을 단호하게 천명했다. 그렇다. 한국의 민주당 계열 정당들의 본질적 정체성은 보수 정당이다.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수구반동 정당이 너무나 오랫동안 보수를 참칭해온 터라 민주당은 그 반작용 내지 반대급부로 진보정당으로 행세 혹은 인식돼왔을 뿐이다.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이 본래의 자리인 보수 정당으로 복귀하고, 국민의힘이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인 수구반동의 위치로 돌아가는 데 대해 민주당에 있는 왕년의 내로라하는 출근한 학생들이 요란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인영 의원이 이러한 반발에 앞장서고 있다. 이 의원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 의장이고, 임 전 비서실장은 3기 의장이었다.


이쯤에서 솔직하게 물어보자. 이인영과 임종석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해 이끌던 정당의 진보적 정책에 감화돼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던가? 그들은 새천년민주당이 자신들이 학생운동을 한창 가열 차게 전개하던 시기에 그토록 격렬하게 비판해온 제도권 보수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력한 득표력과 확고한 지지기반을 염두에 두고서 들어왔을 따름이다. 이인영과 임종석이 득표력과 지지기반이 아니라 가치와 노선을 중시하면서 현실정치권에 입문했다면 그들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민주노동당을 선택했어야 옳았다.


진보정당은 본질상 계급정당이다.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회민주당처럼 특정한 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초지일관 대변하기 마련이다.


반면, 보수 정당은 이념의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개방적 국민정당(Catch-all Party)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돼 금배지를 달고, 이름난 전문경영인이었던 이계안 전 현대자동차그룹 사장이 열린우리당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도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과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이 진보적이되 폐쇄적인 계급정당이 아닌,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실용주의 대중정당을 목표한 데 있었다.


그럼 민주당이 견결한 진보정당으로 일관되게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고 현재 주장하는 이들이 진심으로 계급정당을 지향할까? 단언하건대 아니다.


자당이 진보정당이 돼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민주당 인사들은 한결같이 중산층 이상의 부유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민주당의 만성질환인 위선적이고 표리부동한 ‘양두구육병’이 또다시 도지려 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진보정당임을 거창하게 내세우는 순간 내로남불의 저주가, 양두구육의 부메랑이 윤석열의 불법 계엄 덕분에 지지율이 고공비행 중인 더불어민주당을 거대 운석이 지구와 정면충돌하듯이 세차게 강타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민주당이 진보정당이 돼야 한다는 외침을 선의로 해석하면 노동자 중심의 계급정당이 돼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논리를 펴는 당사자들 스스로가 노동자 계급의 삶을 살 생각이 없음은 당연할 테지만….


민주당이 이참에 확실한 진보정당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논리를 변증법적 유물론, 즉 먹고사니즘의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해부하자면 86 세대의 정당으로 안주하자는 의미이다. 이는 기득권 구태 86 세대의 30년 권세와 부귀영화를 40년으로, 더 나아가 50년으로 연장하자는 탐욕스러운 노림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하겠다.


수동식 타자기로 문건 작성하고, 검정 매직으로 커다란 하얀색 전지 위에 대자보 쓰던 세대가 챗GPT도 모자라 딥시크까지 등장한 이 첨단 과학기술 4차 혁명 시대에 정치권의 주류이자 사회의 주도집단으로 변함없이 군림한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윤석열 같은 구제불능의 광인이 구태여 친위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아도 한국 사회 전체가 1980년대로 강제로 총체적 역주행을 당할 게 틀림없다.


재학생 신분임에도 학교로 등교가 아닌 출근을 했던 인물들에게 미안함과 부채의식을 지녔던 사람들도 이제는 늙었다. 오늘날의 2030 세대는 이인영과 임종석에게 아무리 감사함과 고마움을 갖고 있지 않다. 청년들의 배은망덕함이 밉다면 이 의원과 임 전 실장은 펨코 같은 곳에 회원으로 가입해 배신감을 토로하면 된다. 그곳에서 젊은 유권자들을 지혜롭게 잘 설득해 진보적 계급정당을 건설하시면 되겠다. 젊고 푸릇푸릇한 새싹들을 놔두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 당원과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진보정당을 구현하자고 열을 올리니 아무리 왕년의 걸출하신 의장님들인들 말발이 먹힐 리가 있겠는가?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진정한 진보정당은 계급정당이다. 나이 서른 즈음에 계급정당을 일찌감치 미련 없이 훌훌 포기한 분들이 나이 60이 넘어 진보정당의 이념과 철학을 지키자고 허황하고 모순되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논쟁하는 모습, 우리 인간적으로 너무 웃기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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