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의 진지했던 선전포고
윤석열 대통령이 만우절인 4월 1일 월요일 오전, 의대 정원 증원과 의료 개혁을 주제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보수우파 성향 신문사인 동아일보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의응답 없이 장장 50분에 걸쳐 1만 1,385자를 낭독했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매우 실망스러웠다.
첫째로, 겸손한 소통이 아닌 오만한 불통의 모습만 여전히 보여줬다. 대국민 담화 형식이 상징하는 경직된 하향식 일방주의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강압적 권위주의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윤 대통령이 낭독한 장황하고 기계적인 담화문에는 정면돌파와 강경대응의 우악스러운 옹고집만이 읽힐 뿐이었다.
둘째로, 작금의 의료대란을 초래한 의료계와의 갈등을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할 마음이 없음을 다시금 내비쳤다. 윤 대통령의 담화는 정부와 의사협회가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정면충돌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두 집단 모두 열차에 탑승한 승객, 즉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셋째로, 이 부분이야말로 단연 실망스러운 요소였다. 윤 대통령은 한 나라의 운명과 국정의 운영을 책임진 최고 권력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격적 미성숙과 자제력의 부족을 자기 스스로 노출했다.
투표일이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윤 대통령의 난입에 가까운 전면 등장은 여당인 국민의힘에게는 최대 악재가,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과 조국 대표의 조국혁신당에게는 횡재로 불려도 될 만큼의 초대형 호재가 될 게 뻔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이 대국민 담화를 강행하면서까지 무대의 중심에 서고 말았다. 이준석을 당 밖으로 사실상 쫓아내고, 나경원과 안철수의 집권당 당대표 도전을 좌절시키고, 윤석열에게 시종일관 고분고분했던 김기현까지 결국에는 대표직을 우격다짐으로 사퇴시켰음에도 국민의힘을 향한 윤 대통령의 분노와 피해의식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싸늘한 민심과 여론의 낮은 지지율이 당이 용산 대통령실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운동권 대부’ 함운경의 이유 있는 반란
그러나 국민의힘 구성원들, 특히 수도권 지역구 후보자들은 더는 윤석열과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서울 마포 을 선거구에 출마한 함운경 후보는 윤석열의 담화가 나오기가 무섭게 대통령의 당원직 이탈, 곧 탈당을 촉구하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게재했다.
한때 극렬하고 급진적인 운동권 학생으로 맹활약했던 함운경은 부정하고 편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활용해 재산을 축적ㆍ증식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거대 양당 소속의 22대 총선 출마자들 가운데에서는 지극히 드물게 이른바 검찰 캐비닛을 열어도 두렵고 켕길 구석이 별로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당당함과 자신감이 함운경으로 하여금 여느 집권여당 인사들은 입속에서 혼자 웅얼웅얼 구시렁대온 불편한 진실을 대통령을 겨냥해 주눅 들지 않고 공개적으로 소신 있게 발설하도록 이끌었으리라.
윤석열 대통령의 4월 1일 담화는 영남권과 강남권을 제외한 여당의 지역구 입후보자들에게는 가히 잔인한 정치적 사형선고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국민은 윤석열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과 기조에도 불만이 있지만, 그보다는 윤 대통령의 거칠고 독선적인 통치 방식에 더더욱 뿔이 난 상태다. 만우절 오전의 느닷없는 대국민 담화는 윤 대통령의 그와 같은 성정과 기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임을 확실하게 명토 박아두었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위시한 국민의힘 사람들은 윤 대통령이 1987년 직선제 투쟁 정국의 흐름을 일거에 반전시킨 제2의 6ㆍ29 선언을 혹시 은밀히 준비해 실행에 옮길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했을 성싶다. 반면, 야권은 윤석열이 만에 하나 국민들 앞에서 진심으로 대오각성하고 개과천선하는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두고 속으로 끙끙댔을 터이다.
이변은 없었고, ‘혹시나’는 ‘역시나’로 마무리됐다. 비유하자면, 윤석열 대통령의 2024년 4월 1일의 대국민 담화는 1987년 저 악명 높은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한 전두환이 6월 시민항쟁이 한창 가열 차게 전개되는 중인 동년 6월 29일에 노태우 대신 직접 나타나 개헌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재차 퉁명스럽게 천명한 격이었다. 한마디로, 불타는 민심에 유조차떼기로 기름을 들이부은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에겐 장차 구사할 나름의 계산과 노림수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투표일 당일에도 순식간에 전체 판세를 단숨에 뒤엎을 놀랍고 극적인 사건이 터질 수 있는 게 초연결사회 단계로 진입한 SNS 시대의 선거전 구도이고 양상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본인의 신세를 지구로 향하여 빠른 속도로 맹렬하게 날아오는 혜성을 바라보며 멸종을 예감한 공룡들의 처지에 빗댄 어느 여권 관계자의 솔직한 심경 토로가 현재의 정확한 총선 판도를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공룡과는 달리 달리 슬프고 애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고도의 지능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영장류인 인간이 아니라 파충류인 공룡이 되고 싶은 게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회한 어린 바람이 아닐까? 윤석열은 공룡처럼 거대했던 남한의 보수진영을 한방에 끝장낸 ‘운석 같은 남자’로 한국 정치사에 장구하게 기록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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