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메테르니히를 아시나요
“회의는 춤춘다.”
프랑스의 외무장관 탈레랑은 빈 회의에 참석한 소감을 이와 같은 짤막한 문구로 함축적으로 기록했다.
빈 회의는 산업혁명 이전에 치러진 전쟁들 가운데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던 프랑스 혁명 전쟁의 종결 방안을 논의하려는 목적으로 개최된 회담이다. 프랑스에서 비롯돼 유럽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간 혁명의 기세를 진압하고 봉건적 구체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제외하면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같은 주요한 회의 참가국들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엇갈렸다.
그러므로 회의의 뚜렷한 성과라고는 밤마다 열리는 화려한 무도회가 거의 전부였다. 지루한 물밑 협상과 막판 절충 끝에 얼렁뚱땅 마무리된 회의의 결과물인 빈 체제는 회담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주관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이자 극보수주의자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1848년에 일어난 2월 혁명의 여파로 몰락하기 직전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여론조사는 춤춘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민심의 향배가 급변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러 언론매체들이 이런저런 여론조사 회사들에 의뢰해 실시한 다양한 여론조사 수치들을 종합하면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국민의힘 지지도를 한 주 만에 다시금 앞서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민중의 평균적 삶은 나아지지 않았건만 회의는 경쾌하게 춤추었듯이, 한국 정치의 전반적 수준은 여전히 높아지지 않았음에도 여론조사는 요란하게 출렁이는 양상이다.
메테르니히가 고집스레 대변ㆍ옹호한 낡은 구질서는 중간에 1830년 7월 혁명의 진통을 겪었던 프랑스를 빼놓으면 30년 넘게 지속되었다. 청년세대와 지식인 사회에서 자유주의 사조가 유행하고,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유럽 각국에서 근대적 공장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급속히 대두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정통 귀족가문 출신으로서 보수반동의 화신으로 군림했던 메테르니히가 기획하고 창안해낸 빈 체제는 역사의 거친 풍파와 떠오르는 신흥세력들의 도전을 꽤 오랫동안 버텨냈던 셈이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혁명에 힘입어 탄생했다. 문재인 정권의 주도 집단은 협치와 개혁에 주력하기보다는 각종 운동권 카르텔을 위한 전리품 나눠 먹기에 더 열중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나폴레옹이라는 위대한 풍운아를 남기고 스러졌지만, 한국의 촛불혁명은 변변한 혁명의 상속자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혁명의 영웅들이 있어야 할 곳에는 크고 작은 ‘내로남불’ 스캔들의 주역들만이 악착같이 잔존해 총선 정국을 맞이한 정치권을 무대로 은근슬쩍 재기를 모색하는 중이다.
반동도 평화를 좋아해
실패한 혁명 다음에는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는 게 인류사의 상례였다.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이 차례로 실패한 자리에는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가 수립되었고,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실패한 자리에는 서태후가 전권을 장악한 청나라의 단말마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촛불혁명이 실패한 자리에는 윤석열과 한동훈의 검찰 정권이 들어섰다.
혁명의 잔해 위에 세워진 반동적 권력이라고 하여 과거의 압제와 폭력으로만 무조건 줄달음을 치지는 않는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이 전쟁의 참화에 또다시 휘말리지 않도록 강대국들 사이의 절묘한 세력균형에 입각한 비교적 평화로웠던 국제질서를 창출했다. 서태후는 동치제에게 잠시나마 국정운영을 위임하는 용단을 내림으로써 동치중흥의 짧은 치세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콤비는 동양의 나폴레옹은 당연히 되지 못할지언정 한국의 메테르니히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그 길을 철저히 막아버린 모습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무리한 측근 심기에 따른 ‘친명횡재, 비명횡사’의 공천 파동으로 말미암아 여당이 야당을 상대로 민심의 우위를 일시적으로 탈환한 보름 남짓한 기간에 두 사람은 윤석열 정권이 오는 4월 10일의 22대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어떤 사태가 빚어질지를 너무나 자세하게 미리 보기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첫째로 윤석열 대통령이 뉴라이트적 가치관이 작렬한 삼일절 기념사를 내놨다. 밀접하고 우호적인 한일관계가 우리나라의 경제와 안보에 무척이나 긴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허나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일 년 가운데 딱 이틀은 멈춰야 한다. 3월 1일 삼일절과 8월 15일 광복절에만은….
삼일절 경축사를 한일관계를 향한 찬사에 바치는 데 이용한 윤 대통령의 인간적 오만함과 정무적 무감각은 여당이 이겨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상당수의 국민들에게 재차 일깨웠다.
둘째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도태우 변호사의 국민의힘의 텃밭인 대구 지역구 공천이다. 박근혜 변호인 자격으로 여당의 총선 공천을 받은 인물은 둘이다. 하나는 도태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영하이다. 더욱이 후자는 특혜성 단수 공천을 받았다.
그럼에도 전자에 대한 공천 취소 요구가 봇물을 이루는 데는 도태우가 광주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소행쯤으로 매도한 탓이 크다. 도 변호사의 오도된 언행은 윤석열 대통령을 대박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 역할로 각색된 전두광에 빗대어 윤두광으로 부르는 세간의 풍자적 비판에 진지함과 무게감을 더해줬다. 국민의힘이 득세하면 5공 세력이 끔찍하게 재림한다는 야권의 상투적인 정치공세 프레임에 윤석열 정권이 앞장서서 신선함과 생명력을 부여해준 격이었다.
셋째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석연치 않은 도피성 호주행이다. 용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이 전 장관을 호주 대사로 임명한 결정을 통상적 외교 행위라며 옹호하고 있다.
문제는 비상시도 아닌 평상시의 외교 행위를 야당의 반발과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토록 거칠고 기습적으로 밀어붙인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이종섭이 호주 대사로 부임하지 않으면 안 될 다급한 사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병대 채 모 상병의 순직 사건에 대한 정당한 진상규명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라는 노림수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필자의 이러한 해석은 현재는 대다수 평범한 국민의 생각이기도 하다.
특정한 정권이나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려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겸손하고 성실하게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할 것 같은 인상을 유권자들에게 꾸준히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정부여당은 금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 곧장 계엄령이라도 발동할 듯싶은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를 하필이면 자신들이 여론조사 결과가 잘 나오는 때에 노골적으로 풍기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투표일까지는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았다. 또 어떤 일이 벌어져 선거판이 요동칠지 모른다. 허나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여론조사에서 우세를 점한 얼마 안 되는 시기 동안 윤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여당 인사들은 너무나 강렬하면서도 불길한 인상을 일반 대중의 뇌리에 확연히 각인시켰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들을 일거에 불식시킬 이른바 플랜 B를 윤석열과 한동훈은 과연 준비해놓고 있을까? 조금 더 지켜볼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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