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시민단체 출신 정치인들, 대화와 소통에 서툴러
고계현(이하 고) : 대한민국의 최종적 의사결정권은 정부와 정치권의 정책결정자들이 쥐고 있습니다. 시민운동의 근본적 역할과 목적은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들이 올바른 정책을 만들도록 추동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민사회단체에 계신 분들이 책임성의 측면에서 조금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희준(이하 공) : 시민단체가 국가를 향해 뭔가를 촉구하거나 혹은 대안을 제시하기는 해도 나라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으니까요.
고 : 촉구에 화답할 것인지, 대안을 수용할 것인지는 궁극적으로 정부와 정치권의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특정한 국가정책의 실패와 관련해 시민단체에 그 책임을 지우기는 어려운 까닭입니다. 그러나 시민사회 영역에서 활동해온 인사가 국회에 진출하거나 정부에 참여하게 되면 얘기가 전연 달라집니다. 그때부터는 국가 전반을 시야에 넣고서 생각하고 일해야만 합니다. 자신과 이념이 일치하는 계층만을 염두에 두지 말고, 어떤 선택이 진정으로 국민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며 나라 전체에 도움이 되는지를 종합적이고 총체적 관점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 : 문재인 정부에 등용된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 가운데 그러한 균형감과 책임감을 보여준 사람은 아직껏 별로 없었습니다.
고 : 저는 그분들이 시민운동을 벌이면서 몸에 배인 선입관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민운동은 경우에 따라서 국민들보다 몇 발자국 더 앞서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반면에 정치는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입니다. 몸은 정치로 갔으면서도 마음은 시민운동의 틀에 머물러 있으면 과도한 정파성에 금세 함몰되고 맙니다. 국민들의 엇갈리는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는 통합‧조정하는 데에서 미숙함을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그런 분들은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자세가 덜 갖춰줬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인이 진보 성향의 시민운동에 장기간 투신해왔다면 철학과 소신에서 진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하자는 건 아닙니다. 관건은 공직자는 최종적 의사결정을 하는 책임자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진보진영의 의견은 물론 보수세력의 입장도 들어봐야 합니다. 국정은 방향과 동시에 속도도 살피는 일입니다. 현재의 조건과 상황에서 50km로 달려야 할지, 100km로 주행해야 할지를 신중하고 면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선과 가치를 달리하는 계층과 집단의 목소리를 꼼꼼하게 경청하며 그들과 진정성 있는 토론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시민단체에 계셨던 분들이 이와 같은 방면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태가 빚어지겠습니까? 자기가 시민운동을 하면서 품어온 견해와 신념을 각계각층 국민들과의 충분한 대화와 소통 없이 마구 밀어붙이다가 정책의 본래 긍정적 의도마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 결과 시민운동 출신들은 무능하다는 국민들의 인식만 도리어 강화시키곤 합니다.
위기에 빠진 시민운동을 구하려면
인터뷰가 결론 단계에 들어서면서 대화는 시민운동의 향후 진로와 과제에 관한 내용으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
고 : 우리나라 시민운동은 심각한 위기국면에 봉착해 있습니다.
공 : 시민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최근에는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믿음과 비교해 크게 낫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총장님께서 말씀하신 시민운동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이를테면 참여연대가 자유총연맹 같은 관변단체와 아무 차이가 없다는 생각은, 민주노총은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만을 대변하는 속물적인 이익단체에 불과하다는 느낌은 저 혼자만의 생각과 느낌은 분명 아닐 테니까요.
고 : 현재의 시민운동은 마치 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예비 출마자들의 모임처럼 국민들에게 비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지나친 정치 지향성 하나만이 시민운동의 신뢰도를 훼손해온 건 아닙니다. 더욱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시민운동의 지속가능성에 커다란 의문부호가 찍히고 있는 사실에 있습니다.
공 : 시민운동도 막내가 40살인가요?
고 : 예. 후세대 양성 작업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차세대 활동가와 전문가를 찾는 데 적잖은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남한 청년들의 로망이 교사와 공무원이 된 지는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는 단지 안정된 수입과 정년이 보장된다는 이유만으로 노량진의 공무원시험 학원들로 몰려들었던 1세대 청년들의 나이가 지금 벌써 4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미래지향적 부가가치를 전혀 창출하지 못하는 대표적 기생직종인 교직과 공직에 20년 넘게 청년들이 달려든 후과로 한국사회의 수많은 분야와 영역들에서 대가 끊기는 세대단절 현상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단종(斷種)의 비운을 맞이하기는 시민운동 부문 또한 예외가 아닌 듯싶었다.
고 : 한국도 이제는 정부와 비정부기구(NGO)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평생 시민운동에만 매진하며 자기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자신만의 일가를 이룬 인물이 출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귀감(Role Model)이 될 만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야 젊은 세대들이 시민운동을 일생을 바쳐 해나갈 가치가 있는 천직으로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현대적 유형의 시민운동이 본격화된 이래로 초기의 선도적 활동가들이든, 이후 참여한 중진급 활동가이든 그처럼 일가를 이루고 귀감이 된 사람들이 매우 드뭅니다. 전부들 정치권으로 가버렸습니다. 국민들이 시민운동을 예비 정치인들의 집합소 내지 국회의원 양성소로 여기니 시민단체의 신뢰도가 높게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독립성과 자발성이 견지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은 더 늦게 전에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 일차적 전제조건은 시민운동과 정치권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정립 과정의 대상과 주체에서는 시민운동에서 쌓은 인지도에 힘입어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물들 역시 당연히 포함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야만 할 때입니다. 엄정한 비판과 합리적 대안 제시라는 시민운동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만 할 시점입니다. 따라서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의 무분별한 정치 참여에도 강력한 제동이 걸려야 합니다.
시민운동은 국민들의 신뢰 위에서만 지속가능한 활동입니다. 현재 시민운동 전체가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시민운동 경력과 간판을 앞세워 정치판을 기웃거릴 때가 아닙니다. 시민운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편안한 정치 참여의 길을 모색하지 말고, 시민운동 자체의 역량을 어떻게 높일지를 치열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할 것입니다.
공 : 죽비소리 같은 시원한 말씀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 : 진지하게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계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총장은 1965년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상근자로 들어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는 정책실장과 사무처장을 거쳐 만으로 6년을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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