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그들이 지도부였을 때 나는 무명의 행동대원이었다
공희준 (이하 공) : 현재의 구로디지털밸리는 예전에는 구로공단으로 알려졌던 지역입니다. 김대호 소장님께서는 구로공단을 터전으로 노동운동을 하시면서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셨습니다. 오랜만에 여기 오신 감회가 어떤지 말씀해주세요.
김대호 (이하 김) : 지금은 가리봉동 주민센터와 만민중앙교회가 들어서 있는 이곳은 과거에는 구로2공단 지역으로 불렸습니다. 이 동네는 저에게는 청춘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저는 1986년부터 1993년까지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했었습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를 오롯이 구로공단에서 생활했던 셈입니다.
공 : 학생 신분으로 공단에 들어오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 : 위장취업으로 들어왔습니다.
공 : 주로 어떤 활동을 벌이셨습니까?
김 :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일했습니다.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사업과 상담활동을 펼치는 단체였습니다. 구로가 저에게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제 아내가 이곳에서 첫 아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김대호 소장은 요즘 기준으로는 자식들을 일찍 결혼시켜 빠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된 경우에 속한다. 안정된 수입이 없었을 노동운동가가 공단지역에서 별다른 대책 없이 아이를 낳았던 일을 생각하면 당사자도 아닌 나까지 괜히 눈앞이 깜깜해진다. 안정된 수입이 없는 비정규직 작가 주제에 별다른 대책도 없이 늦은 나이에 덜컥 아버지가 된 필자의 현재가 김대호 소장이 과거와 순간적으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김 : 저는 구로공단에서 ‘최갑환’이라는 가명으로 통했습니다. 최갑환은 사실 제 고향 친구의 친구 이름입니다. 제가 공단지역으로 위장취업을 하면서 썼습니다. 친구가 자기 지인의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등본을 저에게 보내왔는데, 거기에 나온 개인신상정보에 토대해 사용했습니다.
일반 국민들의 거의 모든 개인정보가 전산화된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까마득한 이야기였다. 타인의 주민등록 도용, 암울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만 않는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공 : 박영진 열사는 제가 학교 다닐 적에 집회현장 근처를 지나가다가 간간이 들었던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나름 연식이 됐다는 저마저 그러니 지금의 청년세대에게는 매우 생소한 인물일 수밖에 없는데, 고 박영진 열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략하게나마 소개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 : 박영진 열사는 1986년에 샤프연필 제조업체인 신흥정밀(현재의 마이크로코리아)에서 노조결성과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을 벌이다 분신하신 분입니다. 박영진 열사는 1970년 11월에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그 씨앗을 뿌린 한국 노동운동의 맥과 정신을 잇는 존재로서의 의미가 큰 인물입니다. 전태일 열사와 박영진 열사 두 분이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안에 묻힌 일을 계기로 모란공원은 광주의 망월동 국립묘지와 서울 수유리의 4․19 묘지와 함께 우리나라 민주열사들이 모셔진 3대 묘역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공 : 박영진 열사도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위장취업한 이른바 ‘학출’이었나요?
김 : 박영진 열사는 순수한 의미의 노동자 출신이었습니다.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 마포구 만리동에 위치한 배문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분의 최종 학력이었던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공 :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벌이다가 나중에 제도 정치권에 진출해 유명해진 인물로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를 투톱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비록 현재 진영은 완전히 달라졌지만요. 노동운동가 시절의 김문수와 심상정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김 : 이름 없는 행동대원인 저와는 달리 김문수와 심상정 전부 지도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1985년 6월 하순에 전개된 구로동맹파업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고 지도했던 사람이 김문수와 심상정입니다. 김문수 전 지시와 심상정 전 대표는 원래 ‘서울노동운동연합’이라고 하는 데에서 함께 활동했는데, 김문수 전 지사는 해당 조직의 지도위원이었습니다. 심상정 전 대표의 직함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분명한 건 핵심적 인물로 Organizer(조직가)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심상정과 김문수와 몹시 밀접한 동지관계였습니다.
공 : 제가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심상정 전 대표에게 남편을 소개해준, 즉 중매를 서준 사람이 김문수 전 지사였다고 합니다. 편이야 갈라졌지만 두 사람 모두 수십 년 후에 크게 성공하고 출세하지 않았습니까? 김문수는 보수의 맹주 자리를 노리고 있고, 심상정은 ‘철의 여인’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우리나라 한국 진보세력의 대처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자기 진영을 이끌고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될 만큼 승승장구를 거듭한 김문수와 심상정과 달리 김대호는 왜 출세도, 성공도 못했습니까?
김 : (껄걸 웃으며) 하하하! 세속적 잣대를 대자면 김문수와 심상정 두 사람이 크게 성공하고 출세한 것은 맞겠죠. 그러나 본래의 노동운동의 정신과 가치에 비추면 심상정은 화석이 되었습니다. 김문수는 심성정과는 진영만 달리한 상태에서 마찬가지로 화석이 됐고요.
공 : 본인들은 “우리는 화석이 아니라 보석”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겁니다. (웃음)
김 : 저는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가 한국 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정신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심상정이 화석이 됐다고 평가하는 까닭입니다. 김문수는 화석과 싸우겠다고 장담하다가 반대편에서 화석이 됐고요.
공 : 그렇다면 김대호 소장님은 그분들과는 다르게 화석이 되지 않고 여전히 쌩쌩하다는 뜻인가요?
김 : 그렇습니다. 저는 화석이 아닙니다. 살아있고 진화하고 발전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공정성의 주술에 갇힌 대한민국 교육정책
김대호 소장의 자부심 가득한 단도직입적 선언을 듣자마자 나는 이미 오래전에 교유가 끊긴 김동렬 선배가 돌연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2002년 초가을부터 2004 연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치웹진 서프라이즈를 같이하면서 김동렬 선배를 비교적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포착한 김동렬 선배의 기질적 특성이 김대호로부터 고스란히 목격됐기 때문이다. 김대호가 김문수와 심상정을 ‘화석’이라는 범주 안에 뭉뚱그렸다면, 나는 김대호와 김동렬을 ‘영남 아웃사이더’의 계보 속에 나란히 아우르고 싶어졌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고, 나쁘게 보자면 독선일 영남 비주류의 심리적 기질. 김동렬은 경북 경주 출신이고, 김대호는 경남 삼천포가 고향이다.
공 : 그렇다면 “1980년대 노동운동의 정통성은 김대호 소장에게 있다”고 단언적 명제로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김 : 감히 그렇게는 못하는데…. 사실 저는 노동운동에서의 명성과 존재감에서 김문수나 심상정과 비교하면 상대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투쟁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단지 열심히만 한다고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이 보기에 뭘 했는지 모를 정도로 주변부와 실무현장에서 꼼지락꼼지락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정신과 방법에 대해선 아직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공 : 김문수와 심상정 전부 지도부에 진입했지만, 소장님은 지도부에 포진하지 못한 무명의 활동가였던 탓에 빛이 안 났을 수도 있습니다.
심 : 저는 활동가라고 규정하기조차 민망한 말단 전사였습니다. 총도 없이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심상정과 김문수가 모스크바의 최고사령부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고위장성들이었다면, 김대호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우라!”라는 함성소리와 더불어 독일군의 기관총을 향해 맨몸뚱이로 돌격하는 소련군 총알받이 부대의 이름 없는 졸병이었다는 아련한 후일담으로 내게는 들렸다.
공 :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님과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오늘이 때마침 공교롭게도 2018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입니다. 저는 소위 민주정부가 대표적으로 처참하게 실패한 두 가지 분야가 교육과 부동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남 땅값 폭등도, 망국적인 사교육의 광풍도 진보정권 시대에 유달리 심각해졌거든요. 그 결과 급기야 ‘숙명여고 사태’까지 터지고 말았습니다. 숙명여고가 서울 강남 노른자위 땅에 자리해 있음은 당연하고요. 저는 교육 문제가 한층 더 풀기 어렵게 꼬인 데에는 민주정부들이 교육의 다양성을 증진한다는 미명 아래 도입한 복잡하고 기기묘묘한 입시정책들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고 평가합니다. ‘이해찬 세대’라는 자조적 용어가 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돼오고 있겠습니까? 소장님께서는 민주정부들이 교육의 불평등을 오히려 심화시킨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 공희준 통신원은 교육과 부동산을 민주정부가 대표적으로 실패한 양대 부문으로 판단하는데, 저의 견해는 다릅니다. 왜냐면 실패의 중요도와 치명성을 감안하면 교육과 부동산은 2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대하고 심각한 실패가 존재하는 이유에서입니다.
공 : 교육의 불평등 심화와 강남 부동산 폭등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심각한 실패가 또 따로 있나요?
김 : 경제자살과 고용학살입니다.
공 : 그래도 일단 교육과 부동산에 대해서부터 언급해주셨으면 합니다.
김 : 일단 교육에만 한정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교육의 ‘지위재’적 성격에서 비롯됩니다. 학위와 학벌이 한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재산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학위와 학벌은 특권과, 배제와, 차별을 유발하고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해왔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를 발본적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학위와 학벌로 지위를 부여하는 건 엄청난 지대(地代)를 제공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공 : ‘지대’라고 하면 보통은 부동산 임대료를 가리키는데요.
김 : 자기가 생산하고 창조하는 가치보다 월등히 많은 권리와 이익을 누리고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지대입니다.
공 : 지대를 네 글자로 풀이하면 ‘불로소득’이 되겠네요. 순 우리말로 번역하면 “날로 먹는다”이고요. (웃음)
김 : 우리나라 교육은 이런 지대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공정한 규칙 아래에서 지대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쪽을 향했을 따름입니다.
공 : 착취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진보한 게 아니라, 누구나 착취자가 될 수 있는 쪽으로 진화한 형국이네요?
김 : 교육을 위해 입시가 있는 게 아닌, 입시를 위해 교육이 있는 길로 가버린 겁니다. 교육의 본원적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에 입시 제도의 공정성만 좇게 된 거죠.
공 :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온 격이네요.
김 : 공정성을 기하려면 주관적 요소를 배제해야 합니다. 따라서 객관식 출제 경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부 종합전형은 주관성이 많이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교사나 학보무의 반칙을 용납할 소지가 큽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입시의 공정성을 높이는 일에만 매몰되기 싶고, 그러다 보니 학위와 학벌에 근거해 공급되는 지대를 줄이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것 결합시키고, 저것 보완하고, 요것 갖다 붙이고 한 결과로 입시 제도만 무지하게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공 : 백태웅 하와이대학교 교수,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 은수미 성남시장,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전부 평등을 외쳤거나 외치는 인사들입니다. 한데 모두들 명문대학을 나왔고, 특히나 앞의 세 분은 미국으로 유학 가 그곳에서 학위 혹은 라인센스를 따와서 나중에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데 톡톡히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경로도 지위재를 수취‧향유한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지위재에 편승해 지대를 추구하는 풍조와 습벽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여당과 야당의 차별성이 솔직히 없으니까요.
김 : 저는 그분들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선진 문물을 학습해오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김대호 소장은 필자의 예상 내지 기대와는 달리 굉장히 ‘쿨’한 모습을 과시했다.
한국의 관료사회는 위로 올라갈수록 멍청해져
김 : 관건은 미국 학위 취득의 유무가 아닙니다. 선진적 방법론을 배워오면 그 다음 순서는 대한민국의 현실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고 그에 걸맞은 대안과 해법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의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딴 뒤에 우리나라에서 교수로 취직하면 본연의 활동인 한국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연구에 매진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연금 등 특권을 누리기 일쑤입니다. 이는 비단 대학사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규직 제도 자체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람의 실제적 능력이란 직접 일을 해봐야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평가에 입각해 해당 직무를 계속할 수 있을지 말지가 결정되어야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교수와 공무원 등 한국의 모든 괜찮은 직업사회는 관문, 즉 시험 통과에만 목을 맵니다. 실제적 능력 평가와, 그에 따른 직업근무의 연장 등의 보상 작업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관문 통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적(Performance)에 의거한 평가와 개선이 더욱더 필요하고 본질적 부분입니다.
공 : 한국인들은 만으로 18세 무렵에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 이후로는 형편없는 수준의 국민 평균독서량에 반영되듯이 거의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엄밀히 보자면 시험공부는 공부라고 할 수 없으므로 어쩌면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공부를 하지 않는 국민일 수도 있습니다. “고학력인데 무식”한 평균적 한국인의 초상화가 그려지는 저간의 경입니다.
김 : 수능은 전형적 관문 통과 과정입니다. 이 관문 통과에만 집중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입니다. 이건 대입 수험생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수사회도 매한가지입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데 필요한 외국 학위의 취득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교수로 임용된 다음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평가에 따라 지위와 보상을 달리하는 시스템이 없는지라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겁니다.
공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남겼는데, 작금의 현실은 그 정반대가 돼버렸습니다.
김 : 공무원 사회에서 중요한 건 승진과 보직과 연금입니다. 교수들 역시 똑같습니다. (목청을 높이며) 이건 한마디로 가치전도이고, 본말전도에요! 지금 한국사회 최대의 위기요소들 중 하나가 뭔지 아세요?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담당자들의 능력이 낮아진다는 데 있습니다. 평가보상 시스템이 유명무실한 데다, 진입과 퇴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온 탓입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개별적 능력은 아주 뛰어납니다. 한국의 동사무소 말단 직원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할 겁니다. 공무원이라는 지대의 성채로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로 높이 올라갈수록 무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5급, 3급, 1급, 급기야 대통령까지 능력과 자리가 반비례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틀어쥔 것이 너무나 많은 나라에서 이는 엄청난 국가적 위기입니다.
공 : 역시나 한국사회는 정상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영악하게 악착같이 잘하는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회네요. 그렇다면 김대호가 김문수나 심상정과 달리 출세와 성공을 못한 이유는 사회생활을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입시제도와 관계없이 서울대 들어갔다
공 : 저는 김대호 소장님께서 부잣집 아들은 아니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안의 경제력이 뒷받침해줘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오늘날의 입시제도에서도 소장님은 서울대학교를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 현재의 서울대학교는 지역균형 선발제도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부모의 경제력이 떨어지는 시골 학생들도 입학하기 쉽도록 환경이 갖춰져 있습니다. 저희 때에는 한 반에서 20명씩 총 200명이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고교평준화 제도 시행 전에는 경기고등학교 같은 데서만 400~500명이 서울대를 들어갔습니다. 경복고등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등의 소위 명문 고등학교가 한 해 서울대 입학생의 80~90%를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입생들의 출신 학교가 굉장히 넓고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입시만 보자면 기회균형선발이 원활하게 작동합니다. 문제는 연세대학교나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일반 사립대학교들에서 기회균형선발 전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 개인의 경우에는 현재의 입시제도에서도 서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방에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평준화가 도입되지 않은 지역에서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등을 계속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수능시험도 잘 봤을 것이기 때문에 서울대에 분명 들어갔을 겁니다.
내 주변 지인들 가운데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몇 명 있다. 대개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위인 사람들로, 고교평준화가 실시된 직후에 대학에 들어간 인물들이다. 내가 김대호 소장에게 이번 대담에서 질문한 것과 똑같은 내용의 물음을 예전에 사석에서 하자 이들은 한결같이 “못 갔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이를테면 최광웅 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 원장이 이러한 반응을 보였다. 어떤 형태의 시험에서건 서울대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사례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이 처음이었다. 김대호와 최광웅의 차이점은 만사 자신만만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만사 불여튼튼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이를 연상시켰다. 서울대학교 82학번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한 최광웅과 김대호는 전형적인 시골 수재였다. 최광웅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과 최광웅 데이터정치경제연구원장이 나눈 격론을 담은 대담집을 내년 봄 출간을 목표로 현재 기획‧구상 중에 있다. (②편에서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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