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바 황제는 로마 제국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시해. 즉 타살을 당한 황제였다. 그의 죽음은 고려 의종의 죽음처럼 선연한 핏빛 역사로 기록돼 남았다. 이미지는 KBS 대하사극 「무인시대」 이미지
오토의 타는 목마름은 무참히 시해당한 갈바의 피만으로는 가시지 않았다. 방금 목이 잘린 황제의 머리를 목격한 파렴치한 찬탈자는 이렇게 외쳤다.
“제군들이야, 피소의 목도 보여달라!”
오토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갈바의 후계자인 피소의 목이 도착했다. 부상을 입고 도망치던 피소는 무르쿠스라는 반란군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살인이 행해진 곳은 하필이면 신성한 베스타 신전 안이었다.
권력 실세 비니우스 역시 황천길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죽는 순간 자신도 역모에 가담했다고 구슬프게 하소연했지만, 피에 목마르고 포상에 굶주린 반군들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 애원이었다. 갈바의 목과 피소의 목에 뒤이어 이윽고 비니우스의 목마저 오토의 발아래 나뒹굴었다. 권좌도 잃고 생명도 잃은 세 사람의 목은 반란자들에게는 지금은 일확천금의 횡재를 뜻할 뿐이었다.
「영웅전」의 저자이자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이 잔인하고 무정한 염량세태를 기원전 7세기 무렵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입을 빌려 이처럼 개탄하였다.
“우리가 쓰러뜨린 인간은 고작 일곱 명이었다. 그런데 일곱 명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고 주장하고 나선 자는 무려 천 명이나 되었다.”
갈바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며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자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중 실제로 공로가 인정된 사람의 숫자만 해도 1백 20명에 달했다. 혁명 공신임을 자부하던 이들은 스스로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꼴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오토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비텔리우스가 그들 전원의 신원을 손쉽게 확인해 모조리 처단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 켈수스는 요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오토가 그에게만 특별히 관용을 베푼 덕분이었다. 오토는 충성스러운 성격의 켈수스를 어떻게든 설득해 심복으로 삼고 싶었던 듯하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해 켈수스에게 족쇄를 채운 다음 엄중히 감시하도록 했다.
서기 1세기 중반에 접어든 로마 사회는 지위가 높은 자일수록 기회주의에 찌들기로는 현대 한국과 피장파장이었다. 오토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한 원로원 의원들은 수유의 주저함도 없이 충성의 대상을 손바닥 뒤집듯이 순식간에 바꾸었다. 원로원은 갈바와 피소의 시신이 아직 광장 한가운데 널브러진 상태에서 오토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고는 제국의 새로운 지배자에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동시에 바쳤다.
최고존엄이 불가역적으로 교체되자 죽은 권력자들의 목은 더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 비니우스의 목은 그의 딸이 2천 5백 데나리우스의 거금을 내고 찾아갔다. 피소의 목은 아내 베라니아가 간절히 기도한 바대로 직전 카이사르의 배우자의 품으로 돌아갔다.
반면, 그날 낮까지도 황제였던 갈바의 목은 온갖 모진 모욕을 당한 후에 셋소리움으로 거칠게 던져졌다. 이곳은 황제가 사형판결을 내린 죄인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처형장이었다. 생전에는 머리카락 없는 대머리였다가, 이제 그 머리마저 사라진 갈바의 시신은 오토의 허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프리스쿠스 헬비디우스가 수습해 해방 노예 아르기부스가 밤사이 땅에 매장할 수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바가 로마의 지존으로 등극하기에 재산과 혈통과 덕망 그 어디에서도 자격에 손색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시대의 조류가 완전히 일변했다는 점이었다.
갈바는 평판이 중시되는 공화정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적나라한 실력, 특히 무력이 대세의 흐름을 좌우하는 시기에는 무기력한 군주가 되기 쉬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일례로 님피디우스나 티겔리누스 유형의 네로 정권의 잔당들을 인덕으로 다스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갈바의 노쇠한 육신과 보수적 성향은 급변하는 정세의 도전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응전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갈바가 통치자로서의 단점과 한계를 보완하고 극복하려면 유능하고 청렴한 신료와 참모들의 헌신적인 보좌와 조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현실은 그와는 딴판이었다. 갈바의 짧은 집권기는 비니우스를 필두로 한 부패하고 욕심 많은 권신들이 자행하는 매관매직과 국정농단으로 점철되었다. 갈바는 전임자 네로 못잖게 실패한 인사를 거듭했고, 따라서 구태여 오토가 주도한 배은망덕한 로마식 무신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는 황위를 오랫동안은 유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총화한다면 네로는 젊은 갈바였고, 갈바는 광기가 삭제된 네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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