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민심의 부름을 받았음을 자처했다는 점, 둘째로 온화한 얼굴을 자랑했다는 점. 셋째로 집권하자마자 적폐청산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고대 로마제국의 갈바 황제에 비견될 수가 있다. 이미지는 문 전 대통령이 적폐청산 특별위원회 구성을 지시했다는 소식을 보도했던 법률방송의 뉴스 화면
로마의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는 자정 무렵까지 계속 이어졌다. 님피디우스는 식사와 휴식을 목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터였다.
참석자들 대다수는 님피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군사 호민관 안토니우스 호노라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부하들을 소집해 그간의 오락가락한 행보를 사과하며 자신은 님피디우스를 황제로 모실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네로는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게다가 광대 노릇까지 직접 자청함으로써 황제의 권위와 품격을 심각하게 실추시켰다.
호노라투스는 갈바는 네로 같은 패륜적인 천방지축 망나니가 아님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네로가 이집트로 몰래 망명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님피디우스로부터 전해 들은 후에야 네로를 제거하는 데 군부가 마지못해 동의했던 사실을 부하들에게 상기시켰다. 황제를 시해한 책임이 오롯이 님피디우스에게 있음을 부각하려는 교묘한 보법이었다. 호노라투스는 네로의 피를 손에 묻힌 군부가 갈바의 피마저 마실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로에 이어서 갈바까지 죽이는 짓이 몹시 꺼림칙했던 장병들은 이러한 결론에 전적으로 수긍했다.
갈바를 살려두는 일은 그 대가로 님피디우스의 목숨을 앗아감을 뜻했다. 갈바를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내자고 선동한 전직 근위대장을 그대로 놔둔다면 이는 모반에 동조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이 눈앞에서 아른대면 총기가 흐려지기 쉽다. 호노라투스가 도출한 최종 결론에 찬성한다는 취지로 병사들이 내지른 우렁찬 함성을 님피디우스는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고 외치는 민심의 목소리로 헛듣고 말았다. 그는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횃불을 환하게 앞세우고 서둘러 돌아왔다. 측근 킨고니우스 바르로가 대필로 작성해준 황제직 수락 연설문을 손에 든 채로였다.
막상 도착해보니 낌새가 이상했다. 군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다수의 병사들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방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출입구가 열리고 일행이 군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투창 한 자루가 님피디우스를 겨냥해 빠르게 날아왔다. 경호원 셉티미우스가 방패를 이용해 가까스로 창끝을 막았지만, 홍수로 무너지려는 강둑을 손바닥 하나로 지탱하려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병사들이 떼를 지어 님피디우스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쥐덫 안에 갇힌 초라한 생쥐 꼴이 돼버린 님피디우스는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다 그를 추격해온 병사가 휘두를 칼에 찔려 결국은 절명했다. 병사들은 님피디우스의 주검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서 허망하게 죽고 만 이 탐욕스러운 정치군인의 시신을 꼬박 하루 동안 전시했다.
님피디우스가 비참하게 사망했다는 얘기는 머잖아 갈바의 귀에도 들어갔다. 갈바는 신속하고 전면적인 적폐청산을 명령했다. 님피디우스의 연설 담당 보좌관인 킨고니우스는 물론이고 저 멀리 폰토스의 미트리타테스도 망나니의 칼춤 아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갈바와 황제의 자리를 놓고서 경쟁했던 아프리카의 마케르와 게르마니아의 폰테이우스 역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진행된 숙청의 매서운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두 사람 전부 중앙정부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는 만만찮은 숫자의 병력을 휘하에 거느린 연유에서였다.
님피디우스의 잔당과 반란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든 변방 장수들의 죽음에 대해 로마 민심은 대체로 납득했다.
반면, 네로가 집권했던 시기에 집정관을 역임했던 명망 높은 원로 정치인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가 정식 재판도 받지 않고서 즉결처분을 당한 사건은 로마인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절차적 정당성도, 정무적 필요성도 모두 결여한 노골적인 정치보복 성격의 처형인 탓이었다.
제국에 몰아친 피바람에서는 이름 없는 깃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갈바는 수도 로마의 시가지로부터 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시끄럽고 무질서한 한 무리의 선원들과 맞닥뜨렸다. 네로는 당시 지중해를 무대로 기승을 부리던 해적들을 퇴치하려는 의도에서 뱃사람들을 정식 군대로 편입하는 정책을 채택·실시한 바 있었다. 돌연한 정권 교체의 여파로 말미암아 신분이 불안해질까 봐 걱정된 선원들은 직업군인으로서의 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새 황제와의 면담을 요구하러 온 참이었다.
갈바는 네로가 집행한 국가 정책의 수혜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전임자가 했던 일들이라면 무조건 부정하고 보는 후임자의 전형적인 심리였다. 알현 요청이 거절당한 선원들은 그럼에도 황제의 행렬을 집요하게 계속 따라왔다. 일부는 칼까지 뽑아 들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갈바는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황제의 명령을 받은 기병대는 무자비한 해산 작전에 나섰다.
시위대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음에도 진압은 가혹했다. 제때 도주하지 못한 자들은 기병대의 창칼에 찔리거나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 젊고 잔인했던 네로와는 다르게 인자한 통치를 선보일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노인 황제의 지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대규모 학살극과 더불어 유혈이 낭자하게 막이 올랐다. 상서롭지 못한 불길한 출발이었다.
그러므로 갈바는 네로와의 성공적 차별화에 더더욱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네로는 세금폭탄과 퍼주기의 양극단 사이를 무익하고 줏대 없이 왕복했다. 갈바가 극복하려 시도한 부분은 네로의 무절제한 대중영합주의였다. 그는 긴축재정을 유지하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갈바는 어느 날 만찬장에서 유명한 피리 연주자 카누스에게 연주 솜씨가 훌륭하다고 치하하면서 지갑을 열어 황금을 주었다. 사단은 다음에 빚어졌다. 방금 하사한 금덩어리는 국고가 아닌 황제 개인의 호주머니로부터 나왔음을 갈바가 과도하게 강조하다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기 때문이다. 갈바에게는 네로가 과시했던 화려한 쇼맨십이 부족했다. 사랑처럼 쇼도 아무나 하면 안 되는 일임을 황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듯싶다.
갈바가 무리하게 밀어붙인 상금 회수 정책 또한 ABN(Anything But Nero : 네로만 아니라면) 국정운영 기조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생전의 네로는 극장에선 배우들과 관객들에게, 당대의 로마 사회에서 최고의 인기 운동경기로 군림했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선수들과 관중들에게 상금 명목으로 돈을 펑펑 뿌려댔다.
갈바는 전임 정권의 선심성 현금 살포 정책과 명확하게 선을 긋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네로가 국고에서 빼내 지급한 상금을 전액 환수할 것을 엄명했다. 문제는 상금을 받아간 인물들 수중에 돈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점이었다. 하나같이 진즉에 다 써버린 후였다.
환수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황제는 후속 조치를 발동했다. 상금이 사용된 용처를 일일이 추적해 상금을 받고서 물건을 판매한 상인들이나 용역을 제공한 업자들로부터 돈을 회수하라는 지시였다. 갈바의 상금 국고 환수 방침은 로마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아예 처음부터 주지 않았다면 모를까, 받은 것을 도로 토해내라고 강요한지라 거대한 민심 이반의 후폭풍이 이는 사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허리띠 졸라매기 시책이 그나마 공정하게 실행됐다면 민중의 반감은 조금은 덜했을지 모른다. 인민에게는 자린고비 영감이었던 갈바는 단 한 사람, 곧 킹메이커 역할을 하며 그를 황제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일 비니우스를 향해서만은 달라는 대로 다 주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황제에 대해서도, 황제를 구워삶은 비니우스에 대해서도 인심이 고울 리 없었다.
한 가지 역설적 사실은 정작 비니우스는 느지막이 찾아온 갈바의 전성기가 단명에 그칠 것임을 정확히 예측한 데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처세술에 너무나 충실한 소치였을까? 비니우스는 갈바의 길지 않을 치세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더욱더 악착같이 재물을 긁어모았고, 비니우스의 떴다방식 행태는 갈바의 명을 한층 더 재촉하는 격이 되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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