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갈등구조가 다양하면 대표구조도 다양해야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민주화가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걸출한 정치지도자의 리더십과 함께하는 ‘인물 기반의 민주화’의 특색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진은 1987년 6·29 선언 직후 회동한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과 김영삼 신한민주당 총재의 모습 (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희준(이하 공) : 자신이 만들어낸 몽매하고 허구적인 가상의 세계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윤석열에게 슬기로운 정치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했던 바람으로 보입니다. 최강욱 전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김건희 씨는 그나마 나름대로 현실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현실 세계가 오로지 물질로만 이뤄진 세계라는 점입니다.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 머리에서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합의 개헌을 이뤄낸 8인 정치회의 같은 탁월한 구상이 나왔을 리 만무합니다.
장훈(이하 장) : 이중재는 DJ가 매우 신뢰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공 : 요즘 대선주자들 같았다면 경제통인 이중재 대신 최측근인 권노갑 고문 같은 인사를 8인 정치회의에 보냈을 게 분명합니다. 측근 대신에 경제전문가를 중요한 정치협상장에 내보낸 점이야말로 김대중의 지도력과 통찰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웅변합니다. 그렇지만 양김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면서 YS와 DJ는 거의 역적 취급을 당했습니다. 정치 9단 소리를 들어온 양김이 1987년 대선에서 왜 질 게 뻔한 싸움을 벌였을까요?
장 : 13대 대선의 승패는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이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사실상 결정된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모든 선거는 기본적으로 구도 싸움이기 마련입니다. 후보 단일화는 선거 구도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왔습니다.
공 : 박성민 민기획 대표님은 색다른 정반대 주장을 펴왔습니다. 1987년에 단일화가 불발됐기 때문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그 후에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게 박 대표님 분석입니다. 저는 권력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한 진단에도 충분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면 그 충격과 실망이 더 심했을 거라 봅니다.
장 : 단일화 실패의 여파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또 한 가지 요인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위기는 정치에서 비롯된 위기이지 경제로부터 기인한 위기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분배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 한국의 경제 상황은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순조로운 기반 위에서 대선이 치러진 사실은 집권당 후보였던 노태우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기능했습니다. 한국의 5공 유형의 권위주의 체제의 위기는 정치적 불확실성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두환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겠다는 교과서적 입장 발표 외에는 구체적 정치 일정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 세력에게 자칫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두환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다는 사실은 민주화 운동의 에너지를 가일층 증폭시켰습니다. 동시에 YS와 DJ에게는 반드시 대선에 출마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그러한 동기 부여는 김영삼과 김대중 지지로 나눠 있던 그 무렵의 유학생 사회마저도 들썩이게 했습니다.
공 : 단일화는 실제로는 김영삼으로의 단일화를 함의했습니다. DJ에게는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불공정하게 느껴질 법했습니다.
장 : 그러한 부분까지 염두에 둔다면 노태우 진영에서는 양김의 단일화가 결국은 되지 않으리라고 충분히 낙관할 만했습니다.
공 : 단일화에 맞서서 DJ 측에서 꺼내든 회심의 카드가 4지 필승론이었습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네 사람이 전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면 영남표는 노태우와 김영삼으로 갈라지지만, 호남표는 김대중에게 오롯이 쏠리기 때문에 DJ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 귀에 솔깃한 논리였습니다.
홍희경(이하 홍) : 박성민 대표 주장처럼 87년 대선에서의 득표율 순서대로 YS와 DJ가 나중에 차례로 대통령이 된 데 따른 부작용과 후유증이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후계자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일입니다. 그로 인해 직전 선거의 낙선자가 재수 또는 삼수를 불사하면서까지 대선에 출마하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공 : 당내 경선까지 포함한다면 이제 대선에서 재수는 필수가 됐습니다.
홍 : 재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삼수마저 관례처럼 돼버린 탓에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정책이 출현하기가 매우 어렵게 됐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자신과 코드가 맞는 후계자를 키우는 일도 금기처럼 돼버렸고요. 새로운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하지도 못하고, 새로운 인물을 체계적으로 키우지도 못하는 상황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적잖이 후퇴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저는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됩니다.
장 : 우리나라 정당은 선거 출마자를 주도적으로 배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보가 당을 억지로 끌고 가는 양상이었습니다. 특히 보수 정당은 스스로 후보를 만들어내는 역량을 상실했습니다. 대선 후보를 외부에서 습관적으로 영입하는 실정입니다. 이명박도, 박근혜도, 윤석열도, 김문수도 전부 외주로 데려온 후보이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지금의 국민의힘과 견주면 민주당이 상대적으로 자생력과 연속성이 있었습니다.
홍 : 민주당도 문재인을 기점으로 대선후보 아웃소싱 성격이 뚜렷해졌습니다.
공 : 1987년 대선을 계기로 단일화는 우리나라 각급 선거에서 상수가 됐습니다. 언론과 학계와 시민단체는 정책과 비전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들조차 과연 진심으로 이를 믿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단일화의 유령이 선거판을 배회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정치는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텐데요.
장 : 단일화 프레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제도와 조건이 낳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습니다. 단순 다수 대표제에서는 단 1표 차이라도 무조건 일등만 차지하면 권력을 독식할 수 있습니다. 결선 투표가 도입된다면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상당히 바뀔 테지요.
21세기 한국은 단수 다수 대표제 하나로 모든 것을 담기에는 지역으로든, 계층으로든, 세대로든 이미 너무 복잡하고 다변화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갈등구조가 다양해지면 대표하는 구조도 다양해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다양한 갈등구조에 조응하는 다양한 대표구조가 이제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제도는 단순 다수 대표제이건만, 실제 사회적 갈등구조는 전혀 단순하지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선거 때마다 후보가 난립하기 쉽습니다. 이런 선거 구도에서는 연합(Coalition)을 기민하게 영리하게 하는 후보의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결선 투표제가 시행되고 있었다면 단일화를 추동하는 압박이 훨씬 더 약해졌겠지요.
홍 : 단일화는 항상 인물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양새였습니다. 이념과 가치에 바탕을 둔 연정과 협치가 빈번히 강조돼왔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뤄진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를테면 안철수가 후보 단일화를 위해 중도에 사퇴하면 안철수가 몸담은 당은 아예 사라지고 마는 식이었습니다. 이상적인 모델로 자주 언급되곤 하는 독일식 연정은 그야말로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장 : 연정이 원활하고 성공적으로 작동하려면 참여하는 정당들 사이에 정책적 친화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적 후보 단일화는 단지 선거 승리만을 목표로 하는 원칙 없는 정치공학적 이합집산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식 모델을 과도하게 이상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일의 현재 정치 지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수립한 전후 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다수의 사회과학자를 패전국인 독일에 자문역으로 보내 독일의 정치 지형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를 연구·기획하도록 했습니다. 승전국 미국이 중점을 둔 일은 독일에서 나치당과 같은 파괴적 세력이 압도적 다수를 얻을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제도가 선거에서의 득표율과 의회에서의 의석 점유율이 정확히 연동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유지될수록 수많은 정당들이 명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독일이 조용히 반격에 나섭니다. 첫 번째는 비례대표 의석의 배분 기준을 높이는 조치였습니다.
공 : 검색해보니 전국적으로 5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들에게만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해왔다고 하네요. 5퍼센트면 굉장히 높은 진입장벽입니다. 우리나라였으면 개혁신당조차 의석을 할당받지 못했습니다.
장 : 독일인들이 채택한 두 번째 대응 방안이 바로 연정이었습니다.
공 : 소련은 독일을 동서독으로 나누는 데 만족했지만, 미국은 독일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이전 중세 시대의 봉건적인 할거 체제로 돌려놓으려고 시도했네요. 정말 독하면서도 지능적입니다.
홍 : 미국이 독일에서 실현을 꾀했던 혼란스러운 다당제가 독일처럼 2차 대전 패전국이었던 이탈리에서는 구현됐습니다.
장 : 미국의 전후 전략은 유럽에서는 독일을,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견제하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공 : 소련과의 냉전이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지 않았나요?
장 : 냉전이 본격화된 이후, 독일과 일본은 소련의 진출을 막는 방파제 또는 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힘을 억제하는 일도 더불어 지속했습니다,
홍 : 일본의 경우에는 왕권을 제약하려면 유력한 정당이 대두해야만 하지 않았을까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너무 야박해
공 : 논의의 범위가 세계사 층위까지 확장되고 있네요. 아쉽지만 1980년대 후반의 한반도 남쪽으로 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1988년 봄에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전해 12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의 연장전 같은 판도로 진행됐습니다. 1노 3김이 재격돌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3김, 특히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의 화려한 부활이었습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 불과 넉 달 만의 극적인 재기였습니다. 무엇이 두 사람의 기적적 생환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장 : 8인 정치회의에서의 가장 격렬히 다퉜던 쟁점들 가운데 하나가 유신체제에서 도입된 2인 선거구제를 유지하느냐, 야당이 요구하는 1인 선거구제를 채택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야당, 즉 양김의 의사가 의외로 수월하게 관철됐습니다.
공 : DJ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독자 출마를 강행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여당이었던 민정당 측에 협상의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없었던 듯싶습니다.
장 : 87년 체제의 특징은 유신체제와의 최대한 차별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제에서도 그러한 원칙이 적용됐습니다. 그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양축으로 하는 87년 정치 체제의 큰 틀이 완성됐습니다. 이때 관철된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양김이 권토중래하는 토대 역할을 해줬습니다.
공 : 민정당은 소선구제 아래에서도 압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인데, 여당의 그러한 계산은 이듬해 봄에 치명적 판단착오로 판명됐습니다.
장 : 민정당이 승산을 과신했습니다.
공 : 제가 대학에 들어와 보니까 당시의 캠퍼스에서는 노태우 못잖게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를 기회주의적 보수정치 집단으로 싸잡아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사회변혁의 장애물로 맹렬하게 성토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여러모로 한계는 많았을지언정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아야 하는 부정적 일색 존재들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홍 :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모두 오늘날에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았습니다. 상도동계는 김무성 전 의원 정도만이 활동하는 중이고, 동교동계는 김민석 국무총리와 추미애 의원 정도가 후예로 분류됩니다. 그분들 개개인의 개성이 강하고 존재감이야 뚜렷하지만,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인사들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장 :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친문, 친명, 친윤 등과 같은 현재의 정치적 계파들과는 결을 크게 달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지닌 정치지도자들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를 각각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주화는 개인의 리더십에 큰 영향을 받는 민주화가 되었습니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정치집단이기 이전에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깃발 아래 모인 운동조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운동권과 종교계 또는 언론과 노조 같은 다른 분야들에 비해서 대단히 야박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제도권 정치인인 동시에 반독재 민주화 투사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③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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