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정부의 인터넷 정책기조, 포괄적 허용이 정답이다
이지헌 : 인터넷은 뉴미디어의 견인차이고 모태입니다. 인터넷과 같은 새롭고 혁신적 서비스가 등장하면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규제해야 하는지가 첨예한 쟁점으로 떠오릅니다.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할지 결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술의 보급과 활용을 다루는 데에는 두 가지 유형의 기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괄적 허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포괄적 금지입니다. 진보정부는 미래지향적 세계관을 소유한 인사들이 주도하는 정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부가 인터넷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포괄적 허용, 곧 금지의 제한적 적용을 채택해야 바람직합니다. 저는 그게 인간의 본성과 인터넷의 본질 전부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문재인 정부가 현실에서 인터넷 세계의 질서를 규율하는 방식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고집했던 제어 원리를 거의 예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포괄적 금지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거든요. 사이버 공간에서의 표현의 방식은 무척이나 다양하기 마련입니다. 포괄적 금지의 완고하고 경직된 패러다임으로는 소중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할 수도, 증진할 수도 없습니다.
범죄 예방은 물론 필요합니다. 비윤리적 행위의 억지 또한 당연히 필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방과 억지의 목적인 검열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빌미로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금기와 억압은 그와 같은 빌미에 기생해 태어나고 유지되곤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포괄적 허용에서 그 허용의 기준은 무엇이 돼야 할까요? 그런데 저는 무엇을 허용할지의 기준과 척도 자체보다는, 그러한 척도와 기준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어떻게 구현할지가 더욱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와 동시에 그 과정을 민주주의적으로 꾸려나가는 것도 소홀하게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고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습니다. 네티즌들에게 허탈감과 실망감을 안겨준 부분은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까지도 민주주의적 공론을 거쳐서 도출한 기준과 잣대로 인터넷에서 생겨나는 현상과 사건들을 판정하고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할지를 판단하는 지금의 제도들은 민주주의적 공론의 장을 통해 세워진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 10년 만에 부활한 진보정부가 낡고 비민주적 제도들을 바꾸기 위한 특별한 가시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옛날 시스템을 안일하게 가져다 쓰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주적 공론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제도들은 형식도, 내용도 권위주의적이기 쉽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이 권위주의적 시스템을 참지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왜냐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과거 세대와 비교해 훨씬 성기고 줄어든 통제를 받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허락한 것만 하라”는 식의 강압적 지배철학에 이들은 심각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세대갈등을 좀 더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조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집권세력의 성격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차원만의 사안이 아닙니다. 현재까지 존재해온 역대 우리나라 정부들은 인터넷이 출현하기 이전에 직조된 제도에 익숙한 사람들이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구성해왔습니다. 이 분들은 머리는 진보적일 수 있어도 몸은 진보적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진보적인 정치적 구호를 외친다는 이유만으로 뭉뚱그려 진보로 분류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론장의 실종이 청년층의 실망을 낳는다
제가 왜 이렇게 상당히 도발적이고 이단적 주장을 내놓았겠습니까? 그분들이 젊은이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자유’의 근본 이념에 동의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의 근본 이념이 민주주의적 의사소통이 활발히 교환되는 공론의 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현대국가에서 민주주의적 소통이 오가는 공론의 장이 지속가능하려면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의 실질적 내용이 국민들에게 숨김없이 알려지고 밝혀져야 합니다. 정부 정책의 실질적 내용은 민주주의적 공론의 장에서 시민들의 검증을 받아야만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그러한 검증을 통과한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정비해나가야 했습니다.
인터넷은 이전에는 없던 소통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법과 제도를 요구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은 시민들의 참여의 기회와 폭을 대폭 신장시켰습니다. 정부는 공론장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가진 시민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존의 인터넷 관련 법령과 제도들을 다듬고 개폐하는 작업에 속도감 있게 착수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요? 정부는 여전히 “믿어주세요!”만을 국민들을 향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참여의 문제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로 격하시킨 셈입니다. 형식적 유감 표명 한 차례 내놓은 다음 변화를 위한 아무런 진정성 있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무책임한 대처이고 무성의한 행동입니다.
네티즌들이 정부에게 하려는 말의 본뜻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호통과 엄포가 아닙니다. 정부와 소통하고 싶다는, 대화하기를 원한다는 호소이고 제안입니다.
제가 몸담은 정보통신기술 업종은 청년들이 핵심 역할을 맡은 산업입니다. 문재인 정부에 등 돌린 젊은 기획자들과 개발자들과 영업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년들과 소통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정부에게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들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와는 달라야 합니다. 사전에 아무 각본도 준비하지 않은, 어떠한 기획도 개입하지 않은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민주적 공론의 무대를 열어야 합니다. 이 공론의 마당에서 설령 정부의 귀에 거슬리는 불편한 의견과 주장들이 분출하다고 할지라도 청년들과의 진솔한 소통과 대화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정부는 여기서 논쟁된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에 반영해야 합니다.
현존하는 인터넷 관계 법령들은 한마디로 구시대의 산물들입니다. 정부가 시대착오적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보여준다면 수많은 국민들이, 시민들이, 네티즌들이 정부가 깔아놓은 마당 안으로 기꺼이 자발적으로 다가설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를 사사건건 괴롭히는 보수야당의 습관성 발목잡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동력도 이러한 마당 안에서 충분히 수렴되고 모아질 테고요.
지금 청년세대는 태어난 그때부터 인터넷과 일상적으로 접속해온 인류 최초의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들입니다. 그러나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는 기성세대는 아날로그 시대에 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이 불일치를 너무 늦기 전에 해소해야만 합니다.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비롯한 인터넷을 어떻게 감시하고, 표현의 자유를 어느 수위까지 용인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 젊은 디지털 원주민들의 적극적 참여 아래 진행되어야만 합리적 문제해결 방도를 충분히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온라인에 대한 감시가 아예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습니다. 바라지도 않고요. 테러와 폭력, 혐오와 악의적 가짜뉴스를 막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감시는 필요악인 까닭에서입니다. 관건은 이 감시를 누가, 어떻게 계획하고 이끄는지에 있습니다. 민주적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를 밟아 승인하고 만들어낸 제도만이 여론의 확실한 지지 위에서 사이버 공간의 효과적 수정과 보완과 발전을 도모하고 담보할 수가 있습니다.
온라인 세상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최소한의 감시장치가 민주적 공론장의 검증을 거쳐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이해되고 인정받은 후에야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 누렸던 젊은 누리꾼들의 압도적 지지를 비로소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문재인 정부가 청년층의 지원과 호응에 힘입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진보적 의제들을 뚝심 있게 관철시켜나가길 바랍니다. 정치체제에서건, 인터넷과 관계된 제도에서이건 미래지향적 국가시스템을 구축할 때만이 문제인 정부는 성공한 정권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희준 : 좋은 말씀 귀에 쏙쏙 들어오게끔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지헌 : 저의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을 진지하게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헌 엔지니어는 정보통신기술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획자 겸 개발자로, 현재는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뉴미디어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axnews.co.kr/news/view.php?idx=28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