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와 정봉주, 고래사냥에 나선 새우가 되다
올해 4월 7일 실시될 예정인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승패는 또다시 후보 단일화 실현 여부가 가를 것으로 전망되는 분위기이다. 한국에서 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지 70년이 넘었다. 필자도 예전에는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제도와 의식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우리네 정치 현실이 무척이나 비정상적인 상태로 느껴졌더랬다.
근자에는 견해가 상당히 바뀌었다. 70년을 시도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과 정당정치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불가능한 척박한 불모의 공간으로 판명된 대한민국 땅에서 정당의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며 이뤄지는 다른 정당들 사이의 후보 단일화는 어쩌면 일종의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단일화가 한국정치의 새로운 표준(New Normal)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꼭 야당들만 후보 단일화를 꾀하란 법은 없다. 게다가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응하는 여권 후보 단일화는 실제로 추진된 적이 있다. 2007년에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자의 단일화 모색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범여권의 일원인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자당의 현직 여성 국회의원을 성추행하는 사상 초유의 충격적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금번 서울시장 선거의 정당대결 구도는 ‘2 대 2’ 태그매치로 진행될 가능성이 부쩍 높아졌다.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이 여권을 견인하고,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 야권을 대표하는 모양새이다.
대선 준비에서 서울시장 출마로 방향을 급선회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여론조사 1위를 질주하는 현상은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게 되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안철수와의 단일화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점점 되어가고 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3자가 경쟁해도 승산이 있다는 호언장담을 하고 있지만, 김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은 안철수 대표를 겨냥한 극도의 개인적 불신과 반감을 에둘러 표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님은 물론이리라.
그런데 단일화만 되면 자신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너끈히 당선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인물이 한 명 더 늘어났다. 주인공은 정봉주 전 의원이다. 정 전 의원은 2018년, 서울시장 선거 출마 선언 직후에 불거진 성추행 의혹으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외로운 낭인 신분으로 지내야만 했다. 비록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기는 했으나 그가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다.
한편으로는 불미스럽고 한편으로는 어정쩡한 이 난감한 국면을 자력으로 돌파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때문일까? 정봉주 전 의원은 금년 1월 12일 열린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참여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만약에 그가 예선전인 당내 경선에서 김진애 전 의원에게 승리할 경우 정봉주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여권 후보 단일화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나설 게 분명하다.
필자는 정봉주를 감싸거나 두둔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다. 법원으로부터 나중에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그는 성추행을 둘러싼 공방이 전개되는 와중에서조차 미심쩍은 행동과 석연치 않은 주장을 계속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최근에 더욱더 중요한 가치 척도로 부각되는 성인지 감수성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정봉주 전 의원은 후보검증 과정에서 아예 공직 부적격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건달은 될지언정 양아치는 되지 말자
그럼에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 있다. 정봉주는 문재인 정권 창출의 1등 공신이라는 점이다. 정권 창출에 대한 기여도만 놓고 보자면 정봉주 전 의원의 기여도가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의 기여도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높을 수가 있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양정철 전 민주정책연구원장도, 탁현민 청와대 선임행정관도 정봉주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가며 가시밭길을 꽃길로 바꾸어놓자 그제야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는 ‘사람이 먼저다’이다. 사람이 먼저라 일컬을 때의 사람은 고생한 사람, 수고한 사람, 땀 흘린 사람,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을 의미할 게다. 야권은 당연히 승률만을 기준으로 단일화가 성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이 먼저’라고 주야장천으로 강조해온 여권의 후보 단일화 작업은 이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만 하지 않을까?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해 정봉주는 감옥까지 갔다 왔다. 문재인 정권 인사들이 수시로 자랑하는 민주화투쟁의 간난고초는 수십 년 전의 낡고 희미해진 추억의 한 자락일 뿐이다. 반면, 정봉주의 고난과 시련은 ‘지금 여기에서’의 시련과 고난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이야기한 멋들어진 수사적 문구이다. 조국 사태와 추미애 파동을 차례로 거치고, ‘영끌 투자’와 ‘벼락 거지’가 일상사가 되면서 이제는 문 대통령의 극렬 지지층을 제외한 어떤 국민도 문재인 정권 치하의 우리나라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렇다. 현 여권은 정의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으며, 공정하지도 않다. 문재인 정권 사람들이 야당 시절 입에 항시 달고 살았던 소위 젠더(Gender) 감수성도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성추문에 연루돼 급작스럽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낙마하면서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문 정권 사람들은 다른 모든 분야와 항목은 전부 망가지고 무너졌어도 최소한의 인간적 의리만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구체적 행동으로 증명해주기 바란다. 스스로의 귀책사유로 재보궐 선거가 치러질 시에는 후보를 공천하지 않겠다는 당규마저 서슴없이 폐기한 집단이 현재의 집권세력이다. 그 세력의 주축인 86 세대가 후배세대들에게 그나마 아직도 대놓고 과시할 수 있는 비교우위는 자기네는 의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빛나는 의리를 문재인 정권을 만들고자 집권세력 가운데 유일무이하게 짧지 않은 기간의 수감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정봉주 전 의원에게 이왕이면 발휘해주시라.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정봉주의 서울시장 출마를 애써 모르쇠하는 중인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전폭적 지지선언을 해야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김어준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권력의 8할은 정봉주의 피와 땀과 눈물에 빚지고 있는 탓이다.
의리마저 사라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껄렁한 건달이 비루한 양아치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우리, 건달이라는 빈축은 살지언정 양아치라는 모진소리만은 제발 듣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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