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살아 있는 유령들의 공화국, 살로 공화국을 아시나요
윤석열이 명태균(왼쪽)에서 전한길(오른쪽)로 환승 또는 환승당한 일은 그가 전통적 보수주의자에서 순정 파시스트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는 이탈리아의 독재자이자 파시스트 운동의 선구자였다. 1923년에 일어난 히틀러의 뮌헨 맥주 홀 폭동은 직전 해에 벌어진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을 모방한 사건이었다. 현재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엄격하게 금지·통제돼온 오른쪽 팔을 하늘로 향해 쭉 뻗는 나치식 경례는 무솔리니가 고대 로마의 경례법에서 따온 것을 히틀러가 그대로 가져다 차용한 인사법이었다.
물리적 폭력 투쟁을 수시로 불사하며 국가권력을 장악·획득했다는 측면에서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선배였다. 무솔리니는 권력을 상실하는 방식에서는 남한의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의 선임자 격이었다. 무솔리니와 윤석열 모두 탄핵 표결을 거치며 권좌에서 축출됐다.
윤석열은 불법 친위 군사쿠데타가 실패한 여파로 인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됐다.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탈리아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마침내 본토인 시칠리아섬마저 영미 연합군에서 함락되자 국무회의와 정치국 회의 성격을 겸했던 파시스트 최고 평의회에서 ‘7 : 19’의 압도적 표 차로 탄핵안이 승인됐다.
무솔리니는 탄핵 이튿날 국왕 에마누엘레 3세의 지시로 총리직에서 해임당한 후 아펜니노 산맥에 소재한 한 산장에 구금됐다. 그의 곁에는 29살 연하의 연인인 클라라 페타치가 함께하고 있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윤석열과 부인 김건희 씨가 한남동의 대통령 관저에 사실상 나란히 유폐된 모습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산장에 갇힌 채 전쟁이 끝났어도 무솔리니는 전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리라. 그러나 이는 무솔리니에게 2년 후 봄에 닥칠 비극적 운명을 생각하면 오히려 나을지도 몰랐다. 밀라노의 어느 주요소 건물에 주검이 거꾸로 매달리는 치욕스러운 부관참시만은 최소한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솔리니를 향한 히틀러의 쓸데없는 의리였다. 히틀러는 오토 스코르체니가 지휘하는 특공대에게 산장에 갇힌 무솔리니를 구출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형적인 무인으로 신장 193cm의 거구에 험상궂은 인상의 소유자였던 스코르체니는 총통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해 무솔리니를 산장에서 탈출시켰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무솔리니는 나치의 괴뢰정권에 불과한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세칭 살로 공화국을 수립해 그곳에서 수령(Duce) 행각을 이어갔다.
무솔리니는 형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2인자였다. 실질적으로는 1인자였다. 이때의 이탈리아 왕국은 전통적 보수주의의 틀이 일정하게 유지됐다. 그는 살로 공화국에서는 명목상의 최고존엄이었다. 실제로는 이탈리아 북부를 무력으로 점령한 독일군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살로 공화국은 철두철미한 파시스트 체제였다. 무솔리니의 사위로 파시스트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치아노 백작까지 배신자로 낙인찍혀 총살당한 일은 살로 공화국이 얼마나 살벌하고 잔학한 체제였는지를 여지없이 입증하고 있다.
탄핵당하기 이전의 윤석열은 왕국 시절의 무솔리니처럼 전통적 보수주의자의 외관을 띠었다. 탄핵당한 다음의 윤석열은 살로 공화국에서 진정한 파시스트 체제를 건설하겠다고 광분하던 무솔리니를 시시때때로 떠올리게 한다. 윤석열은 이를테면 사법부의 독립적 역할에 대한 존중과 선거제도의 유효성에 관한 인정 같은 온건하고 상식적인 재래식 보수주의의 흔적을 완전히 걷어내고 무도하고 야만적인 순정 파시스트로서의 근성을 여한 없이 발휘하는 중이다.
전한길에 견주면 명태균은 견결한 민주주의자
윤석열은 결과적으로 명태균에서 전한길로 갈아탄 형국이 돼버렸다. 명태균에 의존하던 윤석열과 전한길에 의지하게 된 윤석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로 명태균은 신기를 뽐냈지, 광기를 부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탄핵 반대 집회의 연사로 나선 전한길은 광기로 시작해 광기로 끝나는 연설을 선보였다. 신기는 허황한 망상에 빠질지언정 폭력을 추종하지는 않는다. 광기는 폭력을 옹호하고 선동한다. 전한길이 명태균과 비교해 100배는 위험한 까닭이다.
명태균은 여론조사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하지만 폭력행위를 공공연히 부추겼다는 비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전한길로 환승한 윤석열은 폭력을 아는 몸이 된 양상이다.
두 번째로 명태균과 전한길이 성장하고 활동해온 지역적 기반의 차이이다. 명태균은 부마항쟁이 증명하듯 보수진영 내에서 상대적으로 진보개혁 성향을 취해온 부산·경남(PK)이 근거지이다. 명태균이 국민의힘 공천 작업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김건희의 국정농단에 관여했다는 의혹은 제기되었을지언정 그가 박정희나 무엇보다도 전두환을 찬양했다는 오점은 포착되지 않는다.
반면, 전한길의 고향인 대구·경북(PK) 지역 유권자들의 상당수는 전두환을 아직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TK는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전두환을 자유롭게 여전히 추켜올릴 수 있는 유일한 고장이다. 전한길의 혜성 같은 정치무대 등장은 윤석열이 김영삼이 상징하는 PK의 합리적 보수와 완벽히 결별하고, 전두환이 표상하는 TK 극우 수꼴보수와 일심동체가 되었음을 웅변한다.
세 번째로 명태균으로부터 전한길로의 무게중심의 이동은 나이든 기득권 세력에서 언제든 폭도로 돌변할 수 있는 젊은 불평불만 분자들로 윤석열의 핵심적 지지기반이 변동했음을 뜻한다. 나이든 태극기 부대는 한국 사회에서 나름 누리고 혜택받은 계층이다. 그와 달리 전한길에 환호하는 젊은 불평불만 집단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이판사판식의 반사회적 행동을 언제든 저지를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 어렵다.
서울 서부지방법원을 습격했다가 검거된 폭도들의 대다수는 정상적 사회화 과정에서 탈락하고, 건전한 노동 현장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1995년 3월, 출근시간대의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 가스 테러를 자행했던 인간들은 일본 사회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방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무리였다.
이탈리아 왕국의 무솔리니가 교활하고 약삭빠른 독재자였다면, 살로 공화국의 무솔리니는 원한과 증오에 사무쳐 미쳐 날뛰는 악귀였다. 만에 하나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서 탄핵안이 인용되지 않고 기각돼 윤석열이 삼각지의 대통령 집무실로 복귀한다면 한국은 제2의 살로 공화국이 될지도 모른다.
살로 공화국의 최후의 결말이 어떨지를 알았다면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특수부대원들에게 구원되느니 차라리 연금상태로 계속 산장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을 게 분명하다. 살로 공화국이 무솔리니를 향해 그나마 약간은 남아 있던 이탈리아 민중의 동정과 연만을 그야말로 순삭시킨 탓이었다.
그렇다. 떠나간 연인의 마음을 다시는 붙잡을 수 없듯이, 손안에서 빠져나간 정치권력을 또다시 움켜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권력을 잃는 건 잠시의 불행일 따름이다. 정작 끔찍하고 커다란 액운은 잃어버린 권력을 무리하게 되찾으려 발버둥을 칠 때 찾아오기 마련이다. 윤석열을 포함하는 지구상의 모든 쫓겨난 권력자들은 이 자명한 진리를 너무 늦기 전에 반드시 깨닫기 바란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