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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내수지향’의 정치에서 벗어나라 - 분단국가 정치인은 영어는 몰라도 외교는 알아야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4-05-28 0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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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는 영어가 아닌 외교에만 집중했다. 이미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개최한 「국민과의 대화」 행사를 기록한 광주 문화방송 영상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첫 번째 공식 기자회견 때의 일화이다. 김영삼 정부 말기,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 사태가 한국으로까지 확산되며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경제주권을 포기해야만 하는 굴욕적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들 가운데 한국 혼자 이무기로 다시 추락한 꼴이었다. 나머지 세 용인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는 국가부도 위기를 비교적 여유롭게 피해간 상태였다.

 

회견장에 등장한 김대중 당선인에게 가장 먼저 쏟아진 질문은 그의 오래된 꿈이었던 대통령의 소망을 이룬 데 대한 기쁨과 감격을 묻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이 당면한 경제적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갈지를 묻는 매섭고 야멸찬 추궁 일색이었다. 망한 집 세간들에다가 빨간 압류 딱지 붙이려 일제히 달려드는 박절하고 몰인정한 빚쟁이들이 따로 없었다.

 

김대중 당선인은 아주 예상 밖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유재건 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에게 즉각 마이크를 넘기며 앞으로 외신기자들과의 모든 질문과 답변은 통역을 통해서만 오갈 것임을 선언했다. 비상한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향후 5년 동안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당선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떠한 오해와 억측의 여지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역시 DJ!”라는 찬탄이 국민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재작년인 2022년 연말에 작고해 지금은 고인이 된 유재건 전 의원은 젊은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지에서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어느 재미교포 남성의 무죄를 밝혀냈을 만큼 영어에 무척이나 능통했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인의 공식 통역자 역할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사실 김 당선인도 유수의 해외 언론사들과 웬만한 영어 문답이 불편함 없이 가능할 정도로 어학 실력이 빼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이 50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한 점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지를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 됨과 동시에 통역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전문 통역사나 그에 상응하는 역량과 자격이 검증된 인물을 반드시 대동시켰다. 소통과 대화의 정확성을 기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책임 있는 지위에 올라간 지도자급 인사라면 해법을 모색하고 결단을 내리는 일에 집중해야지, 우리말을 외국어로 옮기는 번거로운 실무적 작업에 귀중하고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서는 안 된다는 게 DJ의 확고한 철학이자 신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외국, 특히 순방외교를 나갈 경우 영어로 연설하는 것을 선호해왔다. 그의 지독한 영어 사랑은 2030년 엑스포 세계박람회를 부산에 유치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설명회(Presentation) 석상에서마저 멈추지 않았다. 용산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이러한 습관적 영어 사용을 마치 대단한 치적이라도 이룬 양 요란하고 거창하게 선전하기 일쑤였다.

 

필자는 여기에서 허심탄회하게 반문하고 싶다. 윤석열 대통령이 영어를 덜 써서 한국이 엑스포 유치전에서 중동의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에 ‘29 대 119’라는 치욕적 표 차이로 참패했는가? 아니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대한 긴급하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발트해 연안의 소국 리투아니아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남편을 따라 참석한 영부인 김건희 여사가 윤 대통령의 지나친 모국어 사랑에 신물이 난 까닭에 현지의 고급 명품매장을 다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눈치 없이 들렀다가 민심의 지탄을 거세게 받았는가?

 

윤석열 정부가 빚어온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의 총체적 난맥상은 윤 대통령이 영어에 서투른 데 원인이 있지 않다. 최고 통치권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국제정세에 관한 안목과 식견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점에서 비롯돼오고 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세계 4대 열강의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리고, 수도 서울에서 북쪽으로 30분만 자동차로 주행하면 70년간 세습 독재체제를 유지해온 시대착오적인 왕조 국가가 핵폭탄을 위시한 각종 대량살상무기로 중무장한 채 떡하니 버티고 있는 지구촌에서 사실상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대통령이 외국 나가 박수 좀 받겠답시고 한가하게 그럴싸한 영어 단어들이나 외우고 있을 새가 없는 나라인 셈이다.

 

2024년 5월 26과 27일 양일에 걸쳐 서울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벌어지고 있다. 무려 4년 5개월 만에 재개된 동아시아 3국 수뇌부의 만남이다. 일본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동해를 건너왔다. 반면, 서해 너머 중국으로부터 도착한 방문객은 습근평 주석이 아니었다. 명목상의 2인자인 이강 총리였다. 그로 말미암아 적잖이 맥 빠진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성사된 중차대한 외교 무대에서 윤 대통령이 우리에게 익숙한 ‘한중일’ 대신에 고집스레 ‘한일중’을 외치는 광경을 막상 접하고 나니 필자가 당사자인 습 주석이라도 이번 정상회담에 당연히 불참했을 성싶다. 기를 쓰고 한중일을 한일중으로 고쳐 부른 윤 대통령은 이 총리에게 북한의 비핵화에 더해 중국 영내에 은신해 있는 탈북민들 문제에 대한 협조까지 요청했다.

 

국제관계는 형식이 내용을 빈번히 규정하곤 한다. 성질 꾹 누르고 마지못해 한국에 왔더니 넓고 쾌적한 사랑채는 일본에 내주고 비좁고 옹색한 문간방에 머무르라는 한국 정부의 푸대접을 겪은 중국 측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야말로 뺨 맞은 것도 모자라 돈까지 뜯긴 격일지 모른다.

 

이준석 전 개혁신당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국민의힘 대표직에서 쫓겨난 후에는 윤 대통령과 화해 불가능한 정치적 앙숙 관계를 형성해왔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과거에 이런저런 아침 회의들에서마다 사사건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판해 ‘문모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더불어민주당으로 어렵사리 복당한 그는 이 달갑지 않은 별명을 떼려고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팽개치고서 문재인 찬양에 열을 올려왔다.

 

이준석 전 개혁신당 대표는 문재인을 시시콜콜히 비꼬고 흉보던 박지원 못잖게 윤석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거침없이 직격해왔다. 나는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윤 대통령이 시종일관 드러낸 외교적 제구력 난조에 이 전 대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매우 궁금한 차였다. 그래서 뉴스를 검색해봤더니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와 관련해 이준석은 별다른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본인이 외교에 대한 이해도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겸손함의 발로였을까?

 

웬걸! 이준석은 서울대학교에서 「아시아와 세계」란 주제 아래 자기가 영어 강연을 할 예정이라고 홍보하고 있었다. 김대중에게 외교가 먼저고 영어가 나중이었다면, 이준석에게는 영어가 우선이고 외교는 부차적일까? 그건 정치 지도자의 눈이 아닌 동시통역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틀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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