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알고도 당해준 김대중의 의롭고 위대한 결단
“DJ는 친노들로부터 나중에 배반을 당하리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어. 하지만 정권 재창출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위해서 자신이 머잖아 당할 수모와 봉변을 의연히 감당하기로 결단했지.”
며칠 전 필자의 사무실 근처에서 함께 저녁밥을 먹은 어느 선배가 반주를 겸한 소주를 서너 잔 마신 다음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는 1980년대의 엄혹한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19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정치권으로 넘어간 무수한 무명씨들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적 언론매체들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경력을 발판 삼아 제도정치권으로 진출하면 예외 없이 팔자를 크게 고친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그러한 거칠고 의도적인 일반화의 오류에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같은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서 동조ㆍ가담하고 있다.
실상은 상당히 다르다. 정치권으로 진로를 설정한 옛 학생운동 출신 인물들의 대다수는 여느 일반 기업체들에서 수행하는 것과 비슷한 일상적 업무에 주로 종사하다 별다른 노후대책 없이 현업에서 물러났다.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과 차관이 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되고, 공기업의 사장과 임원이 되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필자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던 선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동교동계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활동했다. 김 전 대통령이 어떠한 배경과 동기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렸는지를 나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입장이다. 그는 명목상 김대중의 민주당을 계승한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이 공적인 대의명분보다는 사적인 이해득실과 친소관계로 움직이는 영리조직처럼 변질되고 말았다며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김대중은 이른바 영남민주화 세력이 주도하는 참여정부의 신권력에 의해 본인은 물론이고 그와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해온 동교동계 정치인들까지 모조리 구태로 내몰려 철저히 부정ㆍ청산당할 것임을 진즉에 꿰뚫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남북관계의 총체적 후퇴와 전면적 파탄을 막고자 영남 태생의 비주류 정치인을 후계자로 통 크게 인정했다. 당권을 잃느니 차라리 정권을 내주기를 선택했던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거인다운 풍모였다.
더불어민주당이 아프다. 사화(史禍)인지 물갈이인지 종잡기 헷갈릴 정도의 말 많고 탈 많은 작금의 공천 파동이 그 원인이다. 아무리 명의에게 수술을 받아도 마취에서 깨어나면 통증을 느끼는 법이듯, 설령 부처님이나 공자님이나 예수님이 정당을 창당해 당수 역할을 맡았어도 공천 작업은 고통과 우여곡절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공천하는 일은 곧 누군가를 낙천시킴을 뜻하는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공천과 관련해 불공정 시비가 이는 현상은 일종의 필연적 사태다.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이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구설수에 휩싸이며 오는 4월 10일에 실시될 예정인 제22대 총선이 윤석열 정권 심판이 아닌 이재명 체제의 민주당 단죄처럼 그 본질과 의미가 호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민주당 당권파와 친명 유튜버들은 비주류의 공천 불복과 언론의 과잉보도를 원망하고 있다. 이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박용진 의원을 하위 10 퍼센트로 분류하고,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경선조차 치르지 못하게끔 아예 경선에서 통으로 배제해버린 임혁백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공천관리위원장에 발탁한 당사자는 다름 아닌 이재명 스스로인 탓이다.
올해의 민주당 총선 공천은 ‘사천’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재명 대표의 사심으로 가득 찬 공천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적인 감정을 버리라는 요구가 이재명을 향해 도처에서 빗발치고 있다.
본디 인간은 사심을 버릴 수 없는 존재다. 사심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없으니 사심을 능가할 질과 양의 공심(公心)을 체득해야 한다. 김대중이라고 민주당을 손에서 놓고 싶었겠는가? 당권을 계속 장악하고 싶다는 사심을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공심이 압도했을 따름이다.
박용진과 임종석의 공과에 대한 구체적 평가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이재명 대표가 걱정하는 바처럼 공천을 받아 원내에 진입하면 임종석과 박용진은 이내 이재명에게 곧바로 도전할 개연성이 짙다. 이재명의 우려와 친명세력의 예측대로 그들 두 사람 모두 윤석열 정권과의 투쟁이 아니라 이재명과의 당권 싸움에 더욱더 몰두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재명은 박용진과 임종석 가운데 최소한 한 명에게는 공천을 주는 결단을 내려야 옳다. 그것이 공천 파문을 조기에 수습해 민주당의 혼란해진 전열을 정비하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친명세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문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의 개인적 안위를 챙기는 데 열중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욕하면서 닮아간다고, 문재인의 그와 같은 오류를 이재명이 똑같이 답습해서야 되겠는가?
이준석, 이제는 방송용 마이크를 놓을 때
사심에서 공심으로 나아가자는 필자의 주장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에게도 역시 해당된다.
개혁신당은 현재 창당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개혁신당이 직면한 위기의 심각성은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가일층 낮아지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들이 뚜렷이 웅변한다.
그러나 이준석 대표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당의 회생과 재도약을 목적으로 과감하게 결단했다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당선에 유리한 선거구를 찾아 소위 지역구 쇼핑에 나섰다는 답답한 얘기만이 걸핏하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지만 나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만은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게 한 조직의 리더가 갖춰야 할 올바르고 책임감 있는 자세이다. 양향자 개혁신당 원내대표도, 양경숙ㆍ이원욱ㆍ조응천 의원도, 금태섭 전 의원도, 얼마 전 공천관리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이준석을 따라 집권당을 탈당해 신당에 합류하기로 용단했던 젊은 당직자들도 결국에는 이준석이 어떻게든 살리고 구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준석 대표에게 진솔하게 묻고 싶다. 이준석이 지금 하는 일은 그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을 살리려는 이타적 행동인가? 아니면, 이준석 자기 자신만을 구하려는 이기적 행위인가?
이재명은 이겼는데 민주당이 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개혁신당은 망했는데 이준석은 어찌어찌하여 정치적 생명 연장에 성공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이준석 대표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이리라.
절묘한 전략과 현란한 캠페인 기법이 위기의 개혁신당을 구해낼 수는 없다. 백의종군의 극약 처방까지 포함하는 이준석의 고독하고 희생 어린 결단만이 개혁신당을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 필자가 이준석이 종내에는 계륵이 돼버린 당대표 자리에 더는 연연하지 말고 이를테면 서울 강남 갑 지역구 같은 사회경제적 상징성이 커다란 동네에 출마를 선언하길 바라는 까닭이다.
이준석 대표에 대한 여론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에서는 그가 각종 방송 프로에 자주 나오면 나올수록 그에게도, 당에게도 손해이다. 이준석 대표가 그토록 끔찍이 싫어하는 안철수 의원조차 처음 선거에 나왔을 때는 얼굴이 이른 봄볕에 시커멓게 타도록 넓고 좁음을 가리지 않고 노원구 상계동의 수많은 길거리들에서 이 악물고 발품을 팔았다. 이준석이 방송전파와 인터넷 공간에서 잃어버린 민심의 신뢰와 성원을 되찾을 방법은 말이 아닌 발, 즉 유권자들과 일일이 몸으로 직접 부대끼는 힘들고 고된 아날로그적 선거운동에 역설적으로 있다고 하겠다.
이준석이 헌신하고 희생한 대가로 개혁신당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 극적으로 위기국면을 탈출하면 그가 국민의힘에 뒤이어 개혁신당에서마저 억울하게 쫓겨난다고 하여도 이준석 대표의 위상과 성가와 권위는 오히려 높아질 터이다.
기억하라. 이준석에 대한 민중의 응원과 기대가 단언하건대 제일 고조됐던 시기는 그가 윤석열 일행에게 부당하게 탄압받고 모질게 핍박받을 때였다.
이제 이준석은 별의별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흔해빠진 여의도 정치 건달들처럼 시쳇말로 입을 털 때가 아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번화한 강남역 네거리에서, 테헤란로의 즐비한 고층건물 숲에서 그가 요즘은 외치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성대에 결절이 올 때까지 유세차 확성기에 대고 절규해야 한다. 위기의 이준석에게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고도의 전략적 안목과 분석력이 아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결단력과 절박함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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