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마지노선 VS 지크프리트선
“상처 입은 조개만이 진주를 만든다.”
시련과 고난이 인간을 단단하게 한다는 교훈적 사실을 강조할 때 빈번히 소환ㆍ동원되는 식상한 경구이다. 문제는 상처 입은 조개의 대부분은 진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머잖아 죽고 만다는 점이다.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 곧 현대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창도한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적 산물’로 규정ㆍ표현했다. 타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충돌하며 한 인간의 자아와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시각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기쁜 일도 생기고, 슬픈 일도 일어난다. 심리학자들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인간은 즐거웠던 추억보다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부터 훨씬 더 크고 지속적 영향을 받든다고 한다. 동일한 위험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자기보호 본능의 발로라는 것이다. 우리말로 심리적 외상으로 번역되는 트라우마(Trauma)의 극복이 간단치 않은 이유이다.
트라우마는 개인 수준을 뛰어넘어 집단적 차원에서도 막강한 구속력을 발휘한다. 당대 최강의 육군을 자랑했던 프랑스기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마지노선에서의 농성전을 고집하다 숙적 독일에게 본격적인 지상 전투가 시작된 지 단 6주일 만에 허망하게 백기를 든 사태는 1차 대전에서 몸서리쳐지게 체험했던 참호전의 참혹한 기억 탓이었다. 수백만 명의 프랑스군이 난공불락으로 불리는 마지노선의 요새들 안에 틀어박혔다기 매에 쫓기는 앉은뱅이 오리 신세가 되어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적군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을 치르느라 엄청난 인적 희생을 감당하기는 독일도 매한가지였다. 이를 의식한 독일은 프랑스의 마지노선에 대항해 「니벨룽겐의 반지」에 등장하는 영웅 지크프리트의 이름을 딴 거대 요새인 지크프리트선의 구축에 착수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요새 건설 사업을 중단하고 전차부대와 급강하 폭격기 편대를 앞세운 전격전으로 방향을 틀어 영불 연합군에게 미증유의 대승을 거뒀다.
김만흠 전 국회입법조사처장은 기득권 거대 양당이 주도하는 한국의 작금의 정치현실을 그가 작년 늦가을에 펴낸 책의 제목처럼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정치전쟁’에 빗댔다. 정치를 전쟁처럼 한다는 통렬한 일갈이다.
필자는 김만흠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 가지 주장을 덧붙이고 싶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전쟁을 하기는 하는데 양측 모두 요새 안에 안전하게 은둔한 상태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프랑스군은 마지노선 안에, 독일군은 지크프리트선 내부에 제각기 꼼짝 않고 틀어박혀 좀처럼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양상이다. 거대 양당 사이에 언제 끝날지 모를 지루한 대치가 장기화하고 있는 셈이다.
김건희 기자회견과 이재명의 영장심사
이와 같은 수비 위주의 길고 지루한 대치전이 어째서 한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양측의 최고통수권자가 가진 정신적 상처. 즉 트라우마가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자연인 윤석열 또는 검사 윤석열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다. 변호사 이재명 혹은 성남시장 이재명에 관하여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집중적으로 다루려는 윤석열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후의 윤석열이고, 대선에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던진 다음의 이재명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래 겪었던 가장 큰 트라우마는 무엇일까?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가 텔레비전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공개적인 대국민 사과를 했던 사건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 여사를 보호하겠다는 열망이 윤석열이 이 악물고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잠시나마 제휴하도록 만들었다. 김 여사를 보호하겠다는 열망이 김건희 여사 일가를 성토했던 유승민 전 의원을 경기도를 민주당에 통째로 헌납하더라도 여당의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전에서 떨어뜨리도록 만들었다. 김 여사를 보호하겠다는 열망이 윤 올해 연초에 전파를 탔던 대통령과 KBS 한국방송과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진행자인 박장범 기자가 명품백을 명품백이라 차마 부르지 못하는 희대의 엽기적인 블랙코미디를 선보이도록 만들었다.
반면 여론조사 지지율이 걸핏하면 2할대로 추락하는 민망한 현상도, 2030년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대한민국 부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게 ‘초격차’로 완패한 충격적 사태도 윤 대통령에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은 걸로 분석된다. 윤 대통령이 별다른 타격감을 느끼지 않고 너무 쉽게 툭툭 치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영부인 김건희 여사 혼자만의 행불행이 아닌, 국민 일반의 복리와 관계된 보다 공적이고 보편적인 사안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일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계기로 구실했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기조는 현재와는 많이 달랐을 성싶다. 그는 더욱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집권자가 되었을 테고, 그만큼 더 많은 민심의 지지를 받아 더 성공적 정책집행을 해나가고 있었으리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윤석열 대통령처럼 철통같은 자물쇠 수비(이탈리아어로 ‘Catenaccio’) 정치에 치중해왔다. 필자는 이재명의 철저한 방어 지향적 행태의 밑바탕에는 국회에서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이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았던 쓰라린 기억이 자리해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바이다. 본인이 명색이 국회에서 절대다수의 압도적 과반 의석을 점유한 원내 제1정당의 당수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 영장전담 판사 앞에 서야만 했던 불미스러운 경험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로 이재명의 뇌리에 짙게 남았다고 하겠다.
이재명 대표는 체포동의안 표결 통과가 민주당 내 비이재명계의 조직적 반란표 탓으로 믿고 있는 기색이다. 이재명에게는 민주당 내부를 ‘완정’하는 과제가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급선무로 각인된 듯하다. 밀실 공천이니, 공천 농단이니 하는 분란까지 자초하며 최근 며칠 동안 민주당에 전개되는 매끄럽지 못한 공천 작업은 당내 반란에 대한 이재명 대표의 극단적 공포감이 낳은 산물로 이해되고 있다.
나는 현직 제1야당 대표이자 직전 대통령 선거의 차점 득표자를 투표장이 아닌 재판장에서 제거하려는 집권세력의 의도와 기획이 기본적으로 매우 잘못된 반정치적 발상이라고 꾸준히 비판해왔다. 그러나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분풀이를 당내 비주류에 하려는 것 같은 이재명 대표의 그 측근 동아리의 행동에 대해선 좀처럼 긍정적 평가를 하기가 어렵다.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내각제가 대충 적당히 뒤섞인 형태로 꾸려진 한국의 현존하는 헌정체제에서 대통령과 원내 다수당 대표는 국가통치의 양대 축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통 크게 협치하는 일은 이제는 완전히 물 건너간 분위기이다.
이러한 국민적 기대가 무산된 지금, 두 사람이 상처 입은 조개처럼 입을 앙다물고 껍질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각자의 상처를 궁상스럽게 보듬고 있는 데 열중하는 모습만은 더는 민중 앞에 보여주지 말기 바란다. 대통령과 거대 야당 당수가 바닷물 속에 서식하는 조개가 아닌 한에는 영롱한 진주가 아니라 유능한 정치로 자신들의 진가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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