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반격의 서막을 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본격적인 대반격에 착수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민생 영수회담’을 기습적으로 제안한 이재명 대표의 모습에서는 자못 승자의 여유마저 은근슬쩍 느껴질 정도다. 정부여당을 향해 3대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국회 본청 건물 앞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할 무렵의 굳은 결기와,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려고 지팡이를 힘겹게 짚고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휘청휘청 들어설 즈음의 비장함은 지난 며칠 사이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생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를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정치는 국민들이 정신이 현란해질 지경으로 움직여도 너무 빠르게 움직인다. 윤석열과 이재명의 우열관계가 이처럼 순식간에 뒤바뀔지 과연 누가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에 원인 없는 사건은 없는 법이다. 더욱이 정치의 세계만큼 인과율의 법칙이 철저하게 관철되는 곳도 드물다. 윤석열의 급작스러운 패퇴와 이재명의 경이로운 약진이 단순한 우연의 소산이 아닌 까닭이다.
윤석열의 시간이 이재명의 시간으로 돌변한 사태에는 세 가지 계기가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첫째로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6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경기도를 더불어민주당에게 사실상 헌납한 일이다.
유승민 전 의원이 후보로 나왔다면 여당의 낙승이 예상되는 선거였다. 윤 대통령은 자기에게 고분고분 순종하는 김은혜 용산 대통령실 홍보수석 비서관을 경기지사 선거를 실질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국민의힘 주자로 밀었고, 김은혜는 김동연 현 경기도지사에게 희대의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지방선거 최대 승부처였던 경기도를 지켜냄으로써 이재명 대표는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비교적 조기에 수습할 동력을 획득하게 됐다.
둘째로 이준석 전 대표를 당대표직에서 축출하는 과정에서 국민의힘을 치명적으로 분열시킨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구사해온 전통적인 지역연합 전략 앞에서 국민의힘은 중요한 선거 때마다 번번이 맥을 추지 못해왔다. 이준석 전 대표가 주도적으로 구축한 세대동맹은 국민의힘이 민주당 계열 정당의 지역연합에 효과적으로 맞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이 금쪽같은 세대동맹을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의 손으로 깨뜨리면서 국민의힘은 지지층 층위에서 사실상 반토막이 나버렸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내부의 친명과 비명 간의 해묵은 고질적 갈등은 친이재명 계파의 당내 패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스르르 봉합돼가고 있다.
셋째로 빈번한 압수수색으로 상징되는 검찰정치를 공세종말점 너머로까지 고집한 일이다.
공세종말점은 “공세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소멸하는 시점”을 가리킨다. 공세종말점을 이미 지났는데도 무리하게 공격을 이어가면 적에게 되레 포위를 허용해 아군의 궤멸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의 30만 독일군이 전멸한 근본적 이유도 히틀러가 공세종말점 이상으로 군대를 진격시킨 데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검찰은 히틀러 총통의 기갑부대 같은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천하무적의 위용을 과시하던 독일 전차군단도 공세종말선을 넘어서자 얼마 후 녹슨 고철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와 마찬가지 이치로, 검찰수사가 야당과 정권 반대자들에 대한 노골적 보복 수사로 민심의 시선에 비치는 것과 동시에 수사의 칼끝이 눈에 띄게 무뎌지기 시작했다. 전쟁에서와 매한가지로 정치에서도 공세종말점은 명백하게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승부사 윤석열의 빛과 그림자
흔히 전쟁을 서양식 장기에, 정치를 동양의 바둑에 비유해왔다. 서양식 장기에서는 적의 말을 무조건 많이 잡아야 승리한다. 동양의 바둑에서는 내 집을 많이 확보해야 이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한 다음 줄곧 서양식 장기에만 몰두해왔다. 문제는 좁게는 야당 정치인 전원을, 넓게는 야당 지지자 전체를 사법처리하지 않는 한에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정치를 서양식 장기로 착각한 대가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너무나 크고도 혹독할 테다. 이를테면 2024년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2020년에 치러진 21대 총선의 재판이 될 것이란 전망이 벌써부터 여의도 정치권에 무성하다. 더불어민주당이 강남권을 제외한 수도권 지역의 거의 모든 선거구들을 싹쓸이할 걸로 예상되는 탓이다. 친윤세력에게 장악된 국민의힘은 황교안 체제의 자유한국당처럼 영남권과 강남 일부에서만 겨우 당선자를 낼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혹시 갖고 있을지도 모를 비장의 승부수가 무엇일지 몹시 궁금하다.
윤 대통령이 최근 수시로 드러내는 냉전적 세계관을 고려하면 전격적인 남북 정상회담 추진은 아닐 성싶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유인촌 씨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 보수 쪽 단골 패널로 출연해온 김행 씨를 여성가족부 장관에, 12ㆍ12 군사반란이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신원식 씨를 국방부 장관에 각각 발탁하는 시대착오적 인사정책을 고려하면 과감하고 대폭적인 인적 쇄신을 기대하기도 솔직히 어렵다. 그렇다고 민생경제의 상황이 갑자기 개선될 분위기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에게 진정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지혜로운 행보는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현재 위치 사수가 아닐 것이다. 야당에게 압도적인 국회 다수 의석을 내어준 환경과 구도에서도 윤 대통령의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 방안들을 유연하게 강구해낼 질서 있는 퇴각일 터이다.
그럼에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집권당이 당력을 총동원해 총력전을 전개하는 중인 형국임을 감안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질서 있는 퇴각보다는 장렬한 옥쇄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윤 대통령은 아마도 그렇게 한국의 보수진영을 두 번 초토화할 듯하다. 한번은 검찰총장 시절에 펼쳤던 무자비한 적폐 수사로, 또 한번은 현직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밀어붙인 어이없는 옥쇄 전술로.
진보가 건강해야 보수도 건강하고, 보수가 멀쩡해야 진보도 멀쩡한 법이다. 진보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처럼 뜻 있은 진보 지식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열망해온 멀쩡한 보수의 탄생은 윤석열 정권 후로 또다시 유예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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