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민주당의 사법화’야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였노라.”
김은경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회에 쏠린 사회적 관심의 크기만 놓고 보자면 위와 비슷한 평가가 가능할지 모른다. 언제 출범한 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세간의 이목을 초강력 진공청소기처럼 순식간에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그 어느 정당의, 그 어느 혁신위원회도 누리지 못했던 김은경 호를 향한 폭발적 관심이 몹시나 부정적 성격을 띤다는 데 있다. 현재의 민주당 혁신위원의 수장인 김은경 위원장이 노인 폄하의 끝판왕처럼 자리매김한 탓이다.
필자는 김은경 위원장이 지난달 30일 청년들과의 간담회에서 언급한 여명 투표, 즉 인간의 잔여 수명의 길이에 따라 투표권에 차등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발언의 정확한 의도와 취지가 뭔지를 알지 못한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참말과 막말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곳이 우리나라 정당들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장인 까닭에서이다. 정당이 진행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에서 쏟아져나온 얘기들의 꼬투리를 일일이 잡기 시작하면 한국의 주요 정당들 가운데 민심의 뭇매와 여론을 돌팔매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는가?
최근 며칠 동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중인 김 위원장의 가족사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선 솔직히 귀를 닫고 싶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리나」에 등장한다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구절만 씁쓸하게 뇌리에 떠오를 따름이다.
김은경 혁신위의 때 이른 좌초가 작게는 이재명 대표 개인에게, 크게는 민주당 전반에 던지는 교훈과 시사점은 정작 따로 있다. 그건 더불어민주당의 사활과 성패를 가를 압도적으로 중요하고 우선적인 혁신과제를 더불어민주당 구성원들마저 모른다는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는 오늘날의 한국정치를 황폐하고 쓸모없는 불모지대로 만들어버린 최악의 원인이자 결과로 지목되고 있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한국정치가 급격히 사법화됐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런데 급격히 사법화된 주체가 정치권 전체란 주장은 영락없는 오진이다. 때로는 대화하고 타협하며, 때로는 돌파하고 투쟁하는 정치 본연의 역할을 방기 내지 포기한 채 걸핏하면 검찰청과 경찰서로 달려가는 자기파괴적 충동과 자기혐오적 습성에 급속도로 중독ㆍ침윤된 정당은 다름 아닌 민주당 계열 정당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의 사법화’의 엄밀하고 올바른 표현은 ‘민주당의 사법화’이리라.
분류의 편의상 국민의힘을 보수당으로, 더불어민주당을 진보당으로 각각 호명하기로 하자.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분류임을 독자들께서는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보수당은 1961년의 5ㆍ16 군사쿠데타 이래 줄곧 거대한 사법기구로 구실해왔다. 한마디로, 정당의 외피를 두른 법원 혹은 검찰청이었다. 보수당에 판검사 출신 인물이 유달리 즐비한 일은 그와 같은 태생적 목적과 기능에서 기인한다.
반면, 민주당은 해방공간에서 창당된 지주층 위주의 한국민주당으로부터 새천년민주당에서 분당돼 출현한 열린우리당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 정무조직이었다. “보수는 법무, 진보는 정무”의 갈등구조 위에서 대한민국 정치는 변증법적으로 성장ㆍ발전ㆍ진화돼왔다.
그 장구하고 꾸준한 진화와 발전과 성장의 과정은 2012년을 분수령으로 하여 딱 멈췄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자 견해이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해서? 일베로 상징되는 청년 극우세력이 나타나서? 나꼼수 유형의 직업적 선동집단이 진보진영의 주류로 부상해서?
상법 교수 다음은 세법 교수인가
세 가지 전부 정답이 아니다. 2012년은 한명숙 대표 체제와 이해찬 대표 체제를 차례로 거치며 민주당 계통의 진보정당이 정무조적에서 사법기구로 변질하고, 퇴화하고 역주행한 원년으로 기록되는 해이다. 나는 2012년 봄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국면에서 너무나 많은 법조인들이 민주당 공천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 불길한 느낌은 이른바 사법 리스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작금의 상황에서 생생하고 객관적인 현실로 구체화됐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발표한 선거실용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한미 양국의 민주당 인사들에게는 소중한 복음서로 통하는 책이다. 상대방이 설정한 프레임, 즉 틀 안으로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게 레이코프가 제공하는 핵심적 조언이다.
코끼리를 사법으로 과감하게 치환해보자. 한국의 민주당은 코끼리를 생각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아예 스스로 코끼리가 되고 말았다. 한데 이 진보 코끼리는 아무리 사료를 듬뿍 먹고 조련사에게 열심히 훈련을 받아도 그 체구에서나, 재주에서나 보수 코끼리를 결코 능가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전관예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고위 법관이나 검찰 간부직을 역임한 정치인들 숫자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에게 시쳇말로 잽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더불어민주당은 ‘당의 사법화’에 미친 듯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은경 혁신위원장은 상법 전문가이다. 상법 전문가를 데려다가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폐지를 논의하고, 대의원제의 존치 여부를 고민하니 죽은 죽대로 안 되고, 밥은 밥대로 안 된다. 상법 전문가로 재미를 보지 못했으니 다음번에는 세법 전문가를 영입할지도 모른다. 세법 전문가를 영입했는데도 당의 개혁과 재활에 실패하면 상속법 전문가를 찾아 민주당 지도부는 유수의 로스쿨 강의실을 헤매고 다닐 터.
민주당은 정무조직일 때 흥했고, 사법기구를 흉내 냈을 때 망했다. 허나 변호사 출신 인물이 한 번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또 한 번은 당대표에 선출되며 민주당의 ‘사법화 현상’에는 제동은커녕 되레 나날이 가속도가 붙고 있다.
정치에서 가정법은 부질없는 노릇이겠으나 김태일 전 장안대학교 총장과 김만흠 전 국회 입법조사처장처럼 유연하고 세련된 정무감각을 확실히 체득한 실력 있는 정통 정치학자를 혁신위원장으로 삼고초려했다면 어땠을까? 혁신위로 혹 떼려다 혁신위로 혹 붙이는 희대의 엽기적인 정치적 대참사는 분명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원내 과반 의석을 점유한 직전 집권여당의 혁신위원장 입에서 본인은 교수라 정치에 관해 잘 모른다는 황당하고 무책임한 소리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을 게다.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가장 빛나고 배우는 은막에 비친 자태가 제일 아름답듯이, 정당은 정치에 집중할 경우 단연 강하고 유능한 법이다.
정치인들이,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과 노무현이 몸담았던 정당의 후예들이 검정 매직으로 ‘고소장’이라고 쓴 하얀색 상자 들고서 검찰청과 경찰서를 수시로 드나드는 추태와 꼴불견은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정치의 사법화 흐름에 안일하게 편승했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격으로 사법리스크에 빠져 이 지독한 무더위에 때아닌 된서리를 맞고 있는 민주당을 기적적으로 회생시킬 최고의 혁신 방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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