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석가탄신일에 모세를 추억한다
우리는 고등학교 국민윤리 수업 시간에 종교에는 사제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의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배웠다. 사제의 기능은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안정시키는 관리자 역할을 뜻한다. 예언자의 기능은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앞에서 견인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가리킨다. 필자는 사제적 기능을 현상 유지에 주력하는 소극적(Negative) 기능으로, 예언자적 기능을 현상 타파를 도모하는 적극적(Positive) 기능으로 각각 구분해 정의하고 싶다.
불기 2567년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해 나는 느닷없이 하필이면 성경 속의 모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세는 세속의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중시한 석가모니와 비교해 현존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직접적인 정치투쟁에 더욱더 긴밀하게 관여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정치지도자인 동시에 종교지도자였다. 종교인으로서의 모세는 사제 역할과 예언자 역할을 차례로 수행해야 했다.
모세가 영도하던 유대민족은 파라오가 통치하는 이집트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장기간 해오고 있었다. 힘이 없으면 단결도 수월치 않기 마련이다. 사회적 약자들일수록 고립되고 분산된 각자도생에 열중하는 까닭이다.
이 힘겹고 곤란한 상황에서 사제 모세는 성서에 기록된 여러 가지 재앙들이 이집트 땅으로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을 응징한 끔찍한 재난이 자신들만 신통하게 피해 가는 광경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민족적 일체감과 동질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이 압제자인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참화와 재액이 피압박민족인 유대인들을 잠시 후련하게 해줬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지속적 행복과 번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옆집이 부도가 났다고 하여 우리 집이 부자가 되는 건 아닌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공동체의 유지와 통합에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둔 모세가 나아가야만 할 후속 단계는 유대인 사회의 근본적 변화와 혁신을 추동하는 일이었다. 모세가 시동을 건 변화와 혁신의 완성이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과 독립된 국가의 건설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제 직분을 완수한 모세는 이제 다음 순서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떠안게 됐다.
예언자의 길은 사제의 길과 견주어 몇 배는 더 벅차고 고됐다. 사제는 이집트인을 신의 힘을 빌려 혼내주기만 하면 됐다. 한마디로, 남들이 안 되게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반면, 예언자는 우리가 종국적으로 잘되게 해야 했다. 모세는 유대민족이 창대하게 번성하는 방법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진짜 기적은 이집트 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의 출발
모세를 비롯해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살면서 가나안 땅을 본 적이 없었다. 이집트에 거주하는 유대민족에게 그곳은 단지 미래의 비전으로만 존재하는 약속된 땅이었다.
꿈을 현실로 바꾸려면 과감한 변화와 혁신의 중간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모세의 참다운 위대함은 도전과 모험에 나서느니 비록 노예의 신분일지언정 나름 안전하고 검증된 이집트에서의 현실에 안주하려던 유대인들을 일깨워 신이 약속한 미지의 땅을 향하여 출발하게끔 분발시킨 사실에 있었다.
이집트군의 기병대와 전차부대에 위태롭게 쫓기던 유대민족에 활로를 열어주고자 홍해의 바닷물이 둘로 쫙 갈라진 사건은, 광야에서 굶주리고 허기진 유대인들의 머리 위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가 돌연 무더기로 쏟아진 일은 일종의 막간극에 불과했다고 필자는 감히 불경스럽게도 생각하고 있다.
만약 모세의 비전과 약속을 외면한 채 현실의 문법을 따랐다면 유대인들의 운명은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파라오의 사슬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내가 잘되는 일보다는 남이 안 되는 일에서 기쁨과 위안을 찾는 영원한 2등 시민으로 영원히 남았으리라.
윤석열 정권의 지독한 오만과 독선은, 이준석 전 대표가 축출된 후에 국민의힘이 보여주고 있는 거듭된 자충수와 헛발질은 더불어민주당의 득점으로 좀처럼 연결되지 않아 왔다. 이집트인이 불행해졌다고 해서 유대인이 자동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았던 모세 시대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여당의 실점과 야당의 득점이 따로 놀게 된 본질적 이유는 지금의 더불어민주당과 그 극렬 지지층이 윤석열 정권에 저주를 가져올 수는 있어도, 국민에게 축복을 주지는 못하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문재인 정권 출범 이래 민주당 계열 정당과 한국의 주류 진보진영은 보수 계통 정당들과 남한의 주류 보수세력을 타격할 기술과 극성스러움은 발달했어도, 평범한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진정성 있게 대변할 능력과 의지는 부실한 걸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내로남불’의 진영논리에 과도하게 침윤되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의 견지에서 판단하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관계는 파라오와 모세의 관계라기보다는, 현직 파라오와 파라오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유력한 이집트 귀족의 관계쯤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에 재앙을 선사하는 종목에서는 가히 천부적 재능을 발휘해왔다. 하지만 국민을 위해 기적을 행하는 분야에선 유능하지도, 능동적이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 땅을 약속했던 모세와는 달리 그 어떠한 담대하고 확실한 미래비전도 현재의 민주당은 아직 내놓지 못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그 열성 지지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자고, 국민의힘 정권을 타도하자고, 영부인 김건희 여사를 구속하라고 내일도 모래도 줄기차게 외쳐댈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으로 민중을 인도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국민 일반을 우선하지 않는 정치집단이 여간해서는 헤어나기 힘든 고해의 바다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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