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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희④, “나이든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냉대는 여전해” - 인공지능 시대에도 아나운서들이 살아남을 길은 분명히 있다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3-04-25 20: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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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사회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부문들에서 급속도로 인간을 밀어내고 있다. 한국 프로바둑의 최강자로 장기간 군림해온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바둑기사 알파고와 반상에서 대결을 펼친 인류사의 기념비적 사건은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로 치부되는 분위기이다.

신문기사를 자동으로 읽어주는 서비스는 진즉부터 제공돼왔다. 그럼에도 뉴스를 비롯한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은 인간의 고유한 업무로 버텨왔다. 아나운서들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AI, 즉 인공지능의 침탈 아닌 침탈로부터 본인들의 생존권을 과연 무사히 사수할 수 있을까? 후배들에게 차이는 것도 모자라 인공지능에 치일지도 모를 이중의 위기에 직면한 여성 아나운서들이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유지해갈 수 있을지 박지희 아나운서로부터 들어봤다.

아나운서의 세계에서는 젊은 후배가 절대강자


박지희 아나운서는 인간 아나운서들에게는 AI 아나운서가 침탈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의견을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밝혔다. (사진 : 김한주 사진전문기자)

공희준(이하 공) : 이제까지 여성 아나운서들에게 시간은 자기편이 아니었습니다.

 

박지희(이하 박) : 젊음과 미모는 세월의 풍화 작용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여성 아나운서 사회에서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행동은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저도 한때는 나이든 선배들로부터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시했었습니다. 그런데 공 작가님께서 거명하신 북한의 이춘희 아나운서는 청춘과 미모를 무기로 지금의 위치에 올라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공 : 현재 70세 가까운 인물이니.

 

박지희 아나운서는 이춘희 아나운서를 ‘리춘희’ 아나운서로 우리나라의 공식 방송용어로 정확하게 발음했다. 필자는 이를 ‘이춘희’로 표기했다. 나는 북한도 남한식 두음법칙을 채택해야만 한다는 소신을 견결하게 고수해온 터이다.


박 : 외국 유수의 방송사들도 적잖이 나이든 여성들이 간판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경우가 잦습니다. 더욱이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개념과 의미의 아나운서 직종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백발의 할머니들이 외모를 내세워 그 자리에 있을 리는 없습니다. 저는 북한에서는 체제를 향한 충성심이, 유럽과 미국에서는 검증된 역량과 축적된 경륜이 그들을 그곳으로 밀어 올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나이와 외모가 여전히 은연중에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공 : 어제의 승자가 오늘은 패자가 되는 구조네요.

 

박 : 제가 과거에 단지 젊다는 이유로 나이든 선배들을 밀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언젠가는 저도 젊은 후배들에게 속절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공 : 아나운서님께서는 그 불안감을 어떤 방법으로 떨쳐내고 계시나요?

 

박 : 나이가 들어 젊음을 잃어도 시청자들과 청취자들이 저를 찾도록 이끌 나만의 특장점과 변별력이 무엇일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대체 불가능한 방송인이 돼야 한다는 고민과 모색입니다.

 

공 : 냉정하게 보자면 현역 아나운서들의 상당수는 여기가 미국이나 유럽이었다면 아직은 마이크를 잡지 못했을 수 있겠네요. 더 많은 경험과 수련이 요구됐을 테니까요.

 

박 :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배들 밑에서 때가 오기만을 끈덕지게 기다리고 있었겠죠. 저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누가 설 수 있는지를 결정해선 안 된다고 확신합니다. 아나운서 역시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사양 직종의 운명을 피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저는 세상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분명 진보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체감하고 있습니다. 방송인들을 외모라는 한 가지 획일적 기준만으로 섣부르게 평가하는 시청자들의 숫자가 과거와 비교해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공 :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외모를 덜 중시합니다. 사회를 계도하는 목탁이 되어야 마땅할 기성 언론매체들이 외모가 중요하다고 도리어 열심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박 : 여성 아나운서를 뽑는 과정이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미인선발 대회를 방불하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공 : 여성 아나운서뿐만이 아닙니다. 남성 아나운서들의 용모를 유심히 관찰하면 라디오가 방송의 중심이던 아주 옛날에 활동하던 원로 아나운서분들을 제외하면 대개는 잘생긴 미남들입니다. 박지희 아나운서님과 말씀을 나누다 보니 제가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게 있습니다. 걸 그룹 멤버들은 중학교 졸업할 무렵인 10대 중후반에 데뷔하고, 방송국 아나운서들은 대학을 나올 즈음인 20대 중후반쯤에 방송인으로 첫발을 떼는데 현역으로 활동하는 기간은 10년 안팎으로 얼추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매우 희한했습니다. 한쪽은 무대 위에서 현란하고 깜찍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연예인이고, 다른 한쪽은 근엄한 자세로 점잖게 앉아 뉴스를 읽어주는 방송인이거든요.

 

박 : 두 직종의 직업 수명이 어금지금한 게 현실입니다.

 

인간 아나운서와 인공지능 아나운서가 경쟁한다면

 

공 : 요즘 챗GPT를 위시해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세간의 뜨거운 화제로 부상했습니다. 박지희 아나운서님께서는 메타버스 세상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아나운서가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 아나운서를 대체할 날이 미구에 오리라고 예상하시는지요?

 

박 : 가상 인간이 진짜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이 방송가에는 이미 도래했습니다. 제가 만약 방송사 경영자 입장이라 하여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숨 쉬는 인간 대신에 내 맘대로 부릴 수 있는 사이버 인간을 더 선호할 듯합니다. 당장 아이돌 스타들만 살펴봐도 근심걱정이 일잖아요.

 

공 : 마약, 도박, 음주운전, 병역회피 등 불미스럽고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박 : 팬들이 싫어할 열애설도 수시로 불거집니다. 그와 달리 인공지능이 탄생시킨 가상세계의 인간은 대중의 반감과 혐오감을 자극할 사건사고를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습니다. 인공지능 관련 첨단기술이 더더욱 정교하게 발달해 실제 인간과 가상 인간을 구분할 수 없다는 단계에 진입한다면 실제 인간들은 아나운서 업종에서 모조리 퇴출될 수도 있습니다.

 

공 : 가상 인간들에게는 방송사들이 월급도 줄 필요가 없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의무도 없고, 4대 보험을 제공할 책임도 없으니까요.

 

박 : 그렇죠. 초기에 거액의 개발비가 나가기야 하겠지만 일단 한번 만들어놓고 나면 잠시도 쉬지 않고 굴릴 수가 있습니다. 금상첨화로 가상 인간은 늙지도 않습니다.

 

공 : 안드로이드에게 연식은 있어도 연령은 없습니다.

 

박 : 관리 비용이 전혀 들지가 않습니다. 당장 유명 아이돌들만 해도 의상비며, 분장비며, 품위 유지비며 막대한 투자금액이 필요합니다.

 

공 : 프로그램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 인간은 숙소도 불필요합니다. 경호원들을 붙여줄 필요성도 없고요.

 

박 :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때도 항공권 예약해줄 필요도 없겠죠.

 

공 : 인터넷 통신망으로 클릭 한 번이면 전송 끝입니다.

 

박 : 게다가 AI 아나운서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못하는 외국어가 없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외적인 매력, 곧 외모로 승부해야만 하는 직업군에서는 AI가 경기의 지배자로 부각하는 사태는 이제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아나운서들에게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 된 건 비단 후배들만이 아닙니다. 하드디스크 속의 인공지능도 위협적 경쟁자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AI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방송 분야에 의연히 계속 건재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를테면 대본을 인공지능 또한 사람 같이 소리 내어 낭송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걸맞은, 맥락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섬세한 감정을 실어서 원고를 읽는 일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꿋꿋이 남을 전망입니다.

 

주어진 원고를 무미건조하게 읽는 게 하는 일의 전부라면 인간 아나운서는 머잖아 AI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신세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PD와 작가의 요구 사항을 기능적으로 충족시키는 데만 머물지 않고 대중의 폭넓은 공감을 자아낼 메시지를 전달해줄 수 있는 유능하고 생명력 충만한 방송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인공지능 때문에 겁먹을 까닭이 없습니다.

 

방송사에서 100을 원하면 저는 120을 보여줄 작정입니다. 그래야 후배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고, 인공지능 기술의 거센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은 모든 방송인들에게 부과된 숙제입니다. 시사 프로 진행자이건, 기상캐스터로 일하건, 쇼호스트로 활동하건 간에 부단한 자기계발의 명령으로부터는 예외가 없습니다.

 

공 : 권리를 주장하기 이전에 의무부터 이행하겠다는 말씀이시네요.

 

박 : 방송계에서는 정규직의 비중이 나날이 작아지고 있습니다. 정규직의 감소와 비정규직의 증가는 우리나라 방송가에서는 오래전부터 대세가 되었습니다.

 

공 : 경쟁이 치열한 정도를 넘어 아예 살벌할 것 같습니다.

 

박 : 아나운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직종입니다. 예전만큼 노골적이지는 않겠으나 나이 먹으면 그만둬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이든 아나운서를 대놓고 강제퇴직을 시키지는 않아도 행정업무에 배치하는 방식 등으로 정리에 나서곤 합니다. 대중이 해당 아나운서가 있는지 없는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극히 짧고 중요하지 않은 프로그램만 맡깁니다. 이런 차별의 문화와 배제의 관행이 여태껏 잔존해왔습니다. 그나마 남자 아나운서들은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권위와 중후함이 더해진다고 평가하고는 토론 프로그램 사회를 담당하도록 합니다.

 

공 : 토론 프로그램을 맡으면 권위와 무게감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박 : 전문성을 확보할 기회가 드물었던 여자 아나운서들의 입지는 매우 좁습니다. 젊은 후배들에게 밀려나기에 적합한 조건입니다. 그러니 왜 빨리 짐 싸서 집에 가지 않느냐는 불편한 뒷말이 나오기 일쑤입니다.

 

공 : 집에 가라는 소리를 면전에서는 차마 하지 못하고 뒤에서들 지질하게 구시렁거리네요.

 

박 : 나이든 여성 아나운서들의 귀에까지 그런 수군거림이 마침내 흘러가게 되고, 당사자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맙니다.

 

공 :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사표를 쓰겠네요. 얼마나 어렵게 들어간 직장인데. 회사를 나오신 분들은 어떠한 다른 일을 하시나요? 아무리 굴지의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라도 우리 사회에서 이 지독한 불경기에 재취업은 여간해서는 쉽지가 않습니다.

 

박 : 직접 학원을 운영하기도 하도, 아니면 대학에 출강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⑤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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