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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희③, “방송계를 기쁜 마음으로 떠나는 아나운서는 없다” - 잘못된 일들을 잘못됐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방송인이 되고 싶다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23-04-24 00: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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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 결과로 미국에서 쫓겨난 영국은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등의 록 밴드를 앞세워 북미 대륙으로 돌아왔다. 대영제국이 문화의 힘으로 미국을 재정복하는 광경을 과거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던 한국은 이제 자동차와 반도체를 뒤잇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세 번째 주요 수출품목일 걸 그룹을 내세워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걸 그룹의 문제는 제품(?)의 수명주기가 자동차의 그것만도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10년 넘은 자동차는 나름 흔해도 데뷔 10년차를 맞이한 걸 그룹은 가히 인간문화재에 속하는 까닭이다. 아나운서는 대부분의 모든 직업들처럼 성인이 되어서야만 하는 일이다. 최소한 20대 중반의 연령대에는 도달해야 정식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여성 아나운서의 직업상의 내구연한은 걸 그룹과 비교해 별로 나은 구석이 없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박지희 아나운서는 방송에 익숙해질 만하면 손에서 마이크를 놓아야 하는 여성 아나운서들의 비애와 아픔을 후배 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는 없다는 결의와 투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공희준(이하 공) : 박지희 아나운서님께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계십니다. 아나운서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비정규직 노동자이십니다. 공중파에서 얼굴을 널리 알린 정규직 아나운서는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심지어 재벌가 며느리도 되는데,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는 양상입니다. 일반 사회에서의 승자독식과 부익부 빈익빈이 아나운서 직종에서도 어김없이 펼쳐지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사태를 막으려면 어떠한 방법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방송은 결혼한 여성 아나운서들에게만 유달리 냉정해


박지희 아나운서는 여성 PD와 여성 기자들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깨진 결혼이라는 이름의 유리천장이 유독 여성 아나운서들에게만 단단하게 건재해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 : 김한주 기자)

박지희(이하 박) : 비정규직의 설움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들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나운서들에게는 설령 지상파 방송사의 정규직 아나운서조차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직업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점입니다.

 

공 : 아, 수명이 짧다!

 

박 : 이는 아나운서들에게만 국한된 직업상의 고충이 아닙니다. 다수의 익명의 대중에게 자신의 외모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해당될 수 있는 애로사항입니다. 유수의 방송사에 정규직 아나운서로 입사하면 당사자는 엄청난 희망과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공 :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겠네요.

 

박 :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혹은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회사 내에서 중고품 취급을 은근히 당하게 됩니다. 그러한 취급을 받게 되면 당사자들은 아나운서 생활에 염증과 한계를 느끼는 법입니다. 저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줄곧 일해왔습니다. 일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개인적인 일신상의 변동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계기로 강력하게 작용한 적은 아직은 없습니다.

 

박지희 아나운서는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혼인은 직업인으로서의 경력과 전망에 부정적 요소로 적잖은 구실을 하고 있음을 여전히 부인하기 어렵다.

 

일거리가 불규칙하게 들어오는 것은 거의 모든 프리랜서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여성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게 되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관행처럼 통해왔습니다. 결혼한 여성 아나운서는 더는 아나운서가 아닌 아줌마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왜곡된 인식과 문화가 우리나라 방송가에는 놀랍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공 : 남자 아나운서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집에 가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 텐데요.

 

박 : 남자에게는 결혼했으니 일을 관두라는 얘기를 당연히 아무도 하지를 않습니다.

 

공 : 여성 기자나 여성 PD의 경우는 어떤가요?

 

박 : 오직 여성 아나운서들만이 결혼하면 퇴직해야 한다는 유무형의 압박에 시달립니다.

 

공 : 여성 아나운서가 결혼만 하면 자동으로 성대결절이 생기는 것도 아닐 텐데 괴이해도 정말 괴이합니다.

 

박 : 비정규직인 저도 ‘결혼=퇴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와 비교해 고용의 안정성이 훨씬 더 높을 잘나가는 정규직 여성 아나운서가 결혼하고서 얼마 후에 퇴사를 하거나, 아니면 방송 이외의 다른 영역, 예컨대 사업가로 나서는 광경을 보고 저는 처음에는 선뜻 납득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기혼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주변의 시선과 시청자의 반응을 접하고는 정든 방송사를 눈물을 머금고 떠나야 하는 그분들의 심경이 어떨지 비로소 이해가 됐습니다.

 

공 : 기혼 여성 아나운서들에게 어떤 사태가 일어나기에 차례로 짐을 싸나요?

 

박 :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를 향해 좋은 데로 시집을 갔으니 이제 쉬어도 되지 않느냐는 식의 이야기가 방송 중에 다른 출연자들에 의해 무심결에 발설되곤 합니다. 또는 그와 엇비슷한 내용의 글이 시청자 댓글로 달리기도 합니다.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들일 테지만 당사자인 아나운서 입장에서는 일할 의욕이 확 꺾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였으면 듣지 않았을 오지랖 넓은 충고들입니다. 열정과 신념을 갖고서 본인의 일에 임하는 데는 남성 아나운서와 여성 아나운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성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면 퇴직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은 치열한 경쟁의 마당인 방송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온 수많은 여성 아나운서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이 되기 마련입니다.

 

여성 아나운서들은 각자의 철학과 원칙을 갖고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자신만의 확고한 메시지를 가지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단지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아나운서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가벼운 언행을 몇몇 분들은 너무 쉽게 하십니다. 유명 아나운서가 재벌가 같은 내로라하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며 방송가를 떠나면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해당 아나운서가 즐겁게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손에서 마이크를 놓았다고 지레짐작을 합니다.

 

공 :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평범한 일반 대중의 한 명입니다.

 

박 :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그 소중한 일에서 손을 떼면서 속이 편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방송을 떠나는 아나운서들의 진짜 속마음은 본인 아니면 아무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허탈함과 아쉬움으로 마음속이 꽉 차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방송을 자기의 물질적 욕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경력관리용 징검다리쯤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어쩌면 있을 수는 있겠죠. 그러나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평생 편안히 먹고살 수 있는 생계수단이 튼튼하게 확보됐으니 이제 미련 없이 방송을 접어도 되겠다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기존에 해오던 방송일을 전부 훌훌 던져버린 아나운서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공 : 사람들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배필을 만난 아나운서가 마지막 방송에서 흘린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박 : 진심으로 슬퍼서 흘린 눈물일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남편 잘 만난 여성 아나운서가 회사에 계속 눌러앉아 있었다면 파릇파릇하고 전도유망한 후배들 앞길 가로막는 이기주의자라고 뒤에서 수군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버티기 힘듭니다.

 

공 : 만약에 남자 아나운서가 세상이 알 만한 부잣집 규수에게 장가를 들면 금전의 유혹에서 마침내 완전히 벗어나 소신껏 자유롭게 방송을 하게 됐다며 칭찬 일색이 뒤지 않을까요?

 

박 : 부인이 돈 많다고 퇴진 압력 받을 남성 아나운서가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공 : 생뚱맞은 비유겠으나 박찬호 선수가 천문학적 자산을 소유한 재일교포 집안의 사위가 됐다고 해서 야구를 은퇴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박 : 사회의 낡고 잘못된 인식과 싸우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싸우는 게 옳다면 싸워야죠.

 

아나운서는 뜻 맞는 동지들을 조기에 모을 수 있는 직업


박지희 아나운서는 뜻이 맞는 사람들을 빨리 만나고, 많이 만들기에 최적의 직업이 다름 아닌 아나운서라는 소신을 피력했다. (사진 : 김한주 기자)

대한민국 여성 아나운서의 길지 않은 직업적 수명에 관한 논의는 다른 나라의 사례들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거기에는 심지어 휴전선 너머의 북한도 포함돼 있었다.

 

공 : 북한의 이춘희 아나운서는 1955년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현직 선전선동 일꾼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체제를 달리하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백발을 휘날리는 할머니 아나운서들이 즐비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과장을 섞어 표현하면 여성 아나운서의 직업적 수명이 걸 그룹 멤버들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여성 아나운서들에게 젊음과 미모를 강요하는 낡은 문화는 정권이 몇 번 바뀌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었음에도 어째서 꿈쩍하지 않고 있나요?

 

박 : 저는 제 스스로를 돌아보는 질문을 주기적으로 합니다. 내가 왜 방송일을 하고 싶었는지, 그중에서도 어째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싶었는지를 진지하게 자문하곤 합니다. 저는 그 해답을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는 공적인 사명감과 책임감에서 일관되게 찾고 있습니다. 저는 불의한 것을 불의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조리한 것을 부조리하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기득권자를 기득권자라고 선언하고 싶습니다.

 

저는 뭐가 불의한지를, 어느 것이 부조리한 일인지를, 어떤 인물과 계층이 기득권자들인지를 많은 시청자와 청취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고 정확하게 알리고픈 소망과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방송은 이와 비슷한 염원과 희망을 가진 동지들을 다른 분야들과 견주어 상대적으로 빨리 만나고, 많이 만들 수 있는 직종입니다.

 

공 : 아나운서님께서는 방송의 예언자적 기능에 착목하고 계시네요?

 

박 : 애초부터 거창한 포부와 숭고한 목표의식을 가진 건 물론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속물적 동기도 약간은 개입해 있었습니다. 제가 성장하면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봤던 아나운서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고 화려했거든요. 그분들이 한없이 부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공 : 대단히 진솔한 답변이시네요. 화려함에 대한 동경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보편적 성향입니다. 외경심을 품지 않는 게 그게 외려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더라고요. 사실 초등학교 2학년생인 제 딸아이도 이름난 걸 그룹들 공연하는 동영상들 유튜브로 거의 매일 구경합니다.

 

박 : 여느 10대 청소년들이 아이돌 스타들의 공연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넋을 놓고서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심정으로 저도 어린 시절 다양한 TV 뉴스에 등장하는 아나운서들을 찬탄의 눈빛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되기로 진로를 확정했습니다. 욕망이 꿈으로 승화된 셈이었습니다. (④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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