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공희준(이하 공)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극단적 진영논리는 대한민국을 미래도, 희망도 없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사회로 자꾸만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싸움판의 선봉대 역할을 아나운서들이 맡기 일쑤입니다. 가령 한 사람의 똑같은 아나운서가 자기편에서는 요정으로 추앙받고, 반대편에서는 요괴라고 욕을 먹습니다. 진영싸움의 선두에 아나운서들이 왜 서게 됐나요? 동시에, 아나운서가 진영의 돌격대로 동원되는 지금의 상황이 과연 올바르고 합리적이라고 평가하십니까?
지상파 아나운서는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해
박지희(이하 박) : 대다수 아나운서들은 정치적 색깔을 여간해서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중립을 준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예전에 정치적 파장이 컸던 어떤 한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박지희 아나운서가 언급한 어떤 한 사건은 이번 인터뷰의 주제가 아니므로 필자가 대화 내용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모자이크 처리를 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해당 사건의 시시비비를 자세히 가리는 게 본 인터뷰의 주요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를 나중에 크게 논란에 휩쓸리게 한 발언은 공중파 방송에서 말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진보적 성향 누리꾼들이 주로 청취하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정치적 중립성이나 불편부당함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공간은 아닌 셈입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을 잠깐 예로 들어봐도 될까요?
공 : 배 의원이 제가 현재 거주하는 동네의 지역구 국회의원입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더 쏙쏙 잘될 것 같습니다.
박 : 배현진 의원이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로 근무하던 시절에 뉴스가 생방송으로 전파를 타고 있는 순간에는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카메라가 켜진 동안에는 객관적 입장으로 시청자들 눈에 비쳤습니다. 아나운서들은 특정 방송사의 임직원 신분으로 일하는 기간에는 최대한 중립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방송국을 떠나면 그제야 비로소 본인의 이념과 노선을 명확하게 밟힙니다.
제가 저의 정치적 지향성을 알린 곳은 우리나라 민주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스피커들 가운데 한 명인 이동형 작가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었습니다. 이동형 작가님의 채널을 이를테면 TV 조선의 시청자들이 방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방금 말씀드린 채널에서까지 굳이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공 : 중립이 요구되는 곳에는 중립을 지키되, 정파성을 띠고 있는 곳에 가서는 아나운서님의 철학과 세계관을 명징하게 표출한다는 말씀이시네요.
박 : 예, 그렇습니다. 아나운서는 시청자나 청취자의 선호와 취향을 사전에 충분히 숙지하고 파악한 다음 그에 어울리는 자세와 몸가짐을 취해야 합니다.
공 : 아나운서님께지 지난번에 연루되셨던 사태는 꽤 파장이 컸습니다.
박 : 그 이유는 젠더(Gender) 문제에 관련된 데 있었습니다. 진보진영을 무너뜨리고 싶은 인물들이나 매체들에게 저의 발언은 아주 좋은 공격의 소재와 빌미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가짜 뉴스가 많이 나돌았습니다.
공 : 어떤 가짜 뉴스였나요?
박 : 제가 지상파 방송에서 문제가 된 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잘못된 정보가 유포됐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자들이 그런 방향으로 제 발언을 일방적으로 몰아갔습니다. 저는 객관성과 중립성이 요구되는 방송에서는 저의 개인적 정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을 최대한 자제해왔습니다. 지상파에는 지상파 고유의 규칙과 논리와 문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공 :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신다는 뜻이네요.
박 : 예. 지상파 방송에서는 진행자로서 넘지 말아야 할 위험수위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공 :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면 역시나 유튜브로 가야겠네요.
박 : 거의 모든 아나운서들은 지상파에서 일할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자기검열을 하기 마련입니다. 반면, 유튜브 세계에서는 진보건 보수건 본인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공개합니다. 한 사람의 동일한 아나운서가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는 인상과 뉴미디어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각각 다른 까닭입니다.
공 : 공중파건 유튜브건 아나운서들에게는 고출력 스피커 역할을 한결같이 요구하더라고요.
박 : 출력 높은 스피커 역할을 맡는 건 아나운서들의 직업적 숙명입니다. 진보진영에 속하는 유튜브이든 보수세력 쪽 유튜브이든 젊고 참신한 진행자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공 : 뉴페이스 발굴이 왜 어려운가요?
박 : 아나운서들은 당파성이 강하고 정파성이 짙은 방송에 얼굴을 내밀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출연한 채널이 출연자의 성향으로 등식화될 위험성이 적잖은 연유에서입니다. 어떤 채널에 진행자나 초대손님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 자칫하다가는 두고두고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여파로 출연할 수 있는 방송의 범위가 협소하게 한정되고 맙니다.
정치색을 띤 채널들로부터 진행자를 소개해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저에게 종종 옵니다. 그럴 때면 제가 주변 후배들에게 출연할 의사가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타진해보곤 하는데, 대부분이 난색을 표시합니다. 후배들에게는 두렵고 부담되는 일이거든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정치적 갈등의 희생양이 될 우려도 배제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정치에 관계된 콘텐츠들의 진행을 책임진 진행자들의 숫자가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 : 낙인효과가 그만큼 무섭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네요.
박 :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들도 알고 보면 평범한 노조원일 뿐
공 : 방송사에서 쟁의가 발생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면 투쟁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전술의 일환으로 아나운서처럼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이 농성대열 제일 앞에서 노동조합의 구호와 주장이 담긴 팻말을 들고서 앉아 있곤 합니다. 그러면 일반 대중은 아나운서를 노조에서 제일 강경하고 극단적인 구성원인 것으로 여기기 쉽지 않을까요?
박 : 아나운서들이 강경파의 주축을 이룬다는 생각은 실제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인식입니다. 메인 뉴스의 앵커처럼 시청자들에게 낯익은 인물이 사람들 눈이나 카메라 렌즈에 상대적으로 잘 띄는 곳에 자리해 있어야 파업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홍보하는 데 유리하고 효과적인 것은 물론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선봉에 서라고 강제로 몰아붙이지는 않습니다.
공 : 배현진 의원이 앵커로 있던 때에는 그의 거취를 둘러싸고 회사와 노조가 ‘배현진 쟁탈전’을 벌였을 수도 있겠네요?
박 : MBC의 간판 아나운서였기 때문에 배현진 의원의 진로에 세간이 이목이 쏠리긴 했겠죠. 저는 배현진이 파업을 이탈해 방송에 복귀한 건 순전히 본인의 결정이었으리라고 봅니다.
공 : 동기가 뭐였건 스스로의 선택이었겠네요.
박 : 지금 시대에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 파업에 동참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동료들과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각오와 선후배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결단이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강자인 회사를 상대로 한 투쟁에 참여하기가 힘듭니다.
공 : 아무리 유명한 아나운서도 노조 안에서의 위상은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 평범한 노조원이라는 말씀이네요?
박 : 아나운서는 방송국 조직 내에서 권력이 강하지 않은 직업입니다. 대신에 상징적 가치가 대단히 큽니다. 아나운서가 있고 없고에 따라 대중의 관심도와 주목도가 현격히 달라집니다.
공 : 여론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은 기본입니다.
박 : 아나운서가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된 건 맞습니다. 그러나 파업은 노조원 전부의 뜻과 힘이 합해져야 가능도 하고, 성공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나운서들이 주동자는 아니어도 주동자처럼 간주될 수밖에 없는 환경과 구조가 방송계에는 만들어져 있습니다. (③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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