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정치꾼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안티조선 운동
공희준(이하 공) : 변희재 고문과 황의원 대표 두 사람이 처음에 함께했던 사회적 활동이 안티조선 운동이었죠?
황의원(이하 황) : 예,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이었습니다.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일병 휴가를 나왔다가 변희재 고문과 밀레니엄을 함께한 일이었습니다.
공 : 12월 31일 제야의 밤과 1월 1일 신년맞이 행사를 함께했다니? 그건 일반적으로 연인관계에 있는 남녀가 함께하는 로맨틱한 이벤트인데.
황 : 예, 남자끼리요. (웃음)
공 : 두 분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네요. (웃음)
황 : 정확히는 같이 밤을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변 고문과 12월 31일 저녁에 새로 출간된 「스타비평」을 핑계로 함께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보통은 2~3차까지 가는데, 그날은 다른 용무가 있는지 1차만 하고 끝냈습니다.
공 : 기억이 또렷하시네요.
황 : 변희재 고문의 데뷔작인 「스타비평」 시리즈가 출간된 무렵이라 무척이나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이전부터 눈여겨보던 스타트업이 상장된 날 또는 저평가우량주가 상한가를 친 날이라고나 할까요. 기쁜 마음으로 당연히 축하잔치를 해야 했습니다.
공 : 「스타비평」은 진중권 교수가 변희재 고문을 이죽거릴 때마다 상습적으로 동원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 : 진 교수의 습관성 폄하가 무색하게 「스타비평」은 매우 좋은 책입니다. 당시에는 그와 같은 참신한 기획과 대담한 분석이 돋보이는 책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그럴 테고요. 보수 시사평론가로 유명한 조우석 KBS 한국방송 전 이사가 그때 문화일보 문화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일면식도 없던 변희재 고문을 위해 지면 한 면을 거의 다 채워 「스타비평」 서평을 써줬습니다. “걸작 발견”이란 수준의 호평 일색이었습니다. 「스타비평」 초판의 표지가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 나중에 좀 더 모양새 있는 표지로 리커버판이 「스타비평2」와 함께 나왔습니다. 「스타비평2」도 물론 역작이었죠. 제 개인적 판단으론 2편의 내용이 더 나은 느낌이었습니다.
공 : 진중권이 다소 오버한 측면이 있습니다. 시비를 위한 시비를 걸었어요.
황 : 제가 군대를 제대하니 안티조선 운동이 엄청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안티조선의 확고한 진지로 자리매김한 웹사이트 「우리모두」도 개설된 상황이었습니다.
공 : 「우리모두」는 저도 잘 압니다. 저와 예전에 운명을 같이했던 이름쟁이 최기수 대표가 홈페이지 관리자로 있었으니까요.
황 :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면서 쟁쟁한 논객들을 여러 명 알게 됐습니다. 저처럼 평범한 누리꾼 입장에서 바라보면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스타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빼어난 필력에 저는 그저 놀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 : 안티조선은 참여정부를 탄생시킬 만큼 엄청난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런데 급격하게 권력화하면서 단숨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급속히 변질한, 아니 맛이 간 이유가 뭘까요?
황 : 조선일보가 보수세력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대한민국 최강의 언론사로서 전횡에 가까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시기가 김대중 정부 때까지였습니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는 약한 정권이었습니다. 권력기반이 몹시 취약했습니다.
공 :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의 후보 단일화가 없었으면 국민의정부는 객관적 정세를 고려할 때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황 : 김대중 정부의 집권기간은 언론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동아일보의 “대구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는 제목의 기사도 이때 나왔습니다.
공 : 동아일보의 문제의 그 악명 높은 기사는 우리나라 언론 역사상 최악의 노골적인 지역주의 선동으로 비판받았습니다.
황 : 그러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급속히 퇴조했습니다. 조선일보의 매체 파워가 위축되면 안티조선의 열기도 그와 정비례해 식어야 한다는 게 강준만 교수의 본래 생각이었습니다. 조선일보가 휘둘러온 과도한 권력을 줄인다는 목표가 달성됐으면 새로운 방향의 과제를 모색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미래지향적 방향전환 대신에 노 대통령의 주도 아래 조선일보와의 불필요한 소모전과 감정적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더 좋지 않은 사태는 참여정부가 이념 문제를 선악의 대결 문제로 치환시켜버렸다는 점입니다. 조선일보를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고서 아예 타도의 대상으로 몰아갔습니다. 제 몫을 찾아주겠다는 취지에서 크게 일탈했습니다. 그러면서 운동의 당위성이 무너지고, 목표의 순수성이 퇴색했습니다.
공 : 조선일보와의 적대적 공생을 추구하는 흐름이 시나브로 대세가 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조선일보 욕하는 게 무슨 면죄부처럼 통용되면서 안티조선 진영 내부에서 별 해괴한 작태들이 펼쳐졌습니다.
황 : 김대중 정부 시절에 안티조선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재야에 있던 분들이었습니다.
공 : 한때 유행하던 말로 생활인이요. 소위 유명 인사들은 굉장히 드물었습니다.
황 : 예, 평범한 시민들이 운동의 주축이었습니다. 그러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바쁘게 이름난 사람들이 너도나도 안티조선 운동에 나서겠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공 : 기회주의자들의 특징이 가슴에 비수가 아닌 숟가락을 품고 다니는 데 있습니다. 잔칫상 차려지면 잽싸게 숟가락 꽂으려고요.
황 : 안티조선은 순수하고 평범한 네티즌들이 주동해 출범하고 전개된 운동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이름깨나 알려졌다는 인사들은 운동의 초기 단계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후보 당선과 더불어 파리떼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더라고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공 : 저도 기억납니다. 대선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 서영석 기자가 어느 날 ‘싸리비’라는 필명의 사람 한 명을 데려왔는데, 그게 바로 정청래 씨였습니다.
황 : 그밖에도 여럿이었습니다.
강준만은 마음을 꺾지 말아야 했다
황의원 대표는 안티조선 운동이 노무현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 각광받자 얌체같이 숟가락 들고 나타난 인물들을 몇 명 더 열거했다. 필자는 그들을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들로 여기는 터라 구체적 실명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공 : 조선일보가 권력인 세상에서 조선일보를 까는 것도 권력인 세상으로 바뀌었네요.
황 : 노 전 대통령이 좌표를 찍어주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숟가락 들고 달려드는 양상이었습니다. 여기가 언론개혁의 중심지인지, 아니면 이권 다툼의 아수라장인지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저도 조선일보를 워낙 싫어한 탓에 처음엔 그런 분위기를 진심으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차츰차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안티조선 운동이 정치로 먹고사는 직업 정치인들을 위한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한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정청래 의원이 본인을 ‘안티조선 1호 정치인’으로 자처하는데,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공 : 이참에 정청래에게도 제 몫을 찾아줘야 합니다. 사교육업자 출신 1호 정치인이라고요.
황 : 조선일보 반대 운동의 저작권은 강준만 교수에게 있습니다. 강준만에게는 안티조선의 타락과 변질을 앞장서서 저지하고 비판할 책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는 갑자기 무기력증에 빠진 듯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조기숙 당시 홍보수석(현 이화여대 교수) 같은 경우에는 그 와중에 강준만 교수를 찾아갔는데 거기서 무슨 말들을 나눴는지 궁금합니다.
공 : 윤핵관들이 실컷 집단린치를 해놓고 나경원 전 의원 방문하는 희비극의 예고편 격이네요.
황 : 청와대에서 대통령 참모로 근무하는 인사가 정권에 비판적인 지식인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어르고 달래는 장면 자체가 저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 그 만남 이후로 강준만 교수가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필봉이 눈에 띄게 무뎌졌습니다.
공 : 저는 강준만 교수가 새천년민주당 분당 국면에서 회복 불능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평가합니다. 강 교수가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에 반대하면서 화력의 90 퍼센트가, 아니 99.9 퍼센트가 날아갔거든요. 강준만은 민주당 분당 정국에서 노 전 대통령과 등지면서 정권의 킹메이커로부터 보통의 국립대 교수로 사실상 강등당하고 말았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재야인사가 돼버렸어요. 위상과 발언권이 급전직하했습니다.
황 : 그럼에도 강준만의 이름값은 유지됐습니다. 그러니 한겨레신문이 강준만 교수를 「송건호 언론상」의 수상자로 선정했겠지요. 저는 강준만 교수가 그 과정에서 소극적이나마 변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공 : 권력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황 : 예, 그렇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안티조선의 타락상에 보다 적극적 형태와 방식으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공 : 강준만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안티조선의 부패를 방치 내지 방관했다는 말씀인가요?
황 : 생계와 정년이 완벽히 보장된 국립대 교수마저 학자적 양심에 입각해 입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누가 또 쓴소리를 쏟아내겠습니까? 강준만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탄생에 지대한 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학교 안팎으로 수많은 제자들과 강력한 팬클럽도 있었고요. 더욱이 본인이 소유한 독립적인 중견 출판사도 갖고 있었습니다.
공 : 저는 강준만이 변절했다기보다는 패배주의에 함몰됐다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배터리가 전부 방전된 거죠. 소위 말하는 번아웃(Burnout) 증후군 상태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인데, 마음이 무참하게 꺾였느니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황 : 저는 강준만 교수가 기존의 전통적인 종이언론에만 머물지 말고 온라인 매체들로 과감하게 진출해 안티조선을 정상화하는 데 힘을 보태야만 했었다고 믿습니다.
공 : 전투적 글쓰기를 지향하던 강 교수가 갑자기 점잖아진 건 사실입니다.
황 : 강준만이 저항을 계속했다면 지원군으로 합류했을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당장 변희재 고문부터 있었습니다. 친노언론이 난닝구로 매도한 민주당 사수파도 여전히 버티고 있었고요.
공 : 난닝구로 불렸던 사람들은 별 힘이 없었습니다. 구태로 몰려 사방팔방으로 하들 두들겨 맞다 보니 다들 멘탈이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황 : 진실과 정의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선동했던 지식인에게는 그에 따른 업보가 있기 마련입니다. 천하의 강준만이 그렇게 쉽게 손을 놓아서는 안 됐습니다. (④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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