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안철수가 계속 의사로 남았다면
안철수의 기세가 놀랍다. 어떤 기세로 놀랍냐? 집권 여당의 주류 세력에 편입되려고 몸부림치는 안철수 의원의 거침없는 기세가 놀랍다는 뜻이다.
안철수가 1995년 봄부터 2012년 가을에 걸쳐 이룩한 빛나는 성공의 비결은 그가 편하고 안전한 주류의 길을 과감히 포기했다는 데 있었다.
안철수가 졸업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이과의 최고지존이었다. 문과의 최고존엄 서울법대가 법학전문대학원 체제 도입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현재, 서울의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원톱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했다.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과 자식이 서울의대에 합격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대한민국 여성들의 99퍼센트는 단언하건대 일말의 주저함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게다. 서울대 나온 의사는 걸어 다니는 건물로 통하는 연유에서이다.
안철수는 일찌감치 그 좋은 의사 직업을 자발적으로 접었다. 안철수가 의료계의 짭짤한 주류로 안주했다면 그는 지금쯤 대통령 자리가 아닌 대통령 주치의 자리를 노리며 보건복지부 주변을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벤처기업인으로 변신한 안철수는 그곳에서도 이단아적 존재였다. 우리나라 벤처업계의 주류들은 힘센 기존 대기업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부단하게 노력하기 마련이다. 네이버 설립자 이해진은 그가 한국사회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로 성장했어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향해 좀처럼 쓴소리를 내지 못한다. 필자는 카카오 최대주주 김범수가 현대자동차나 SK 텔레콤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적 의견을 개진했다는 소식을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다.
안철수는 전통재벌들과는 척을 질 능력도 의사도 없는 신흥 IT 거부들과는 결이 달랐다. 안철수가 ‘삼성 동물원’과 ‘LG 동물원’을 차례로 명징하게 언급하며 기성 대기업들의 탐욕스럽고 패권주의적인 행태에 분연히 돌직구를 날렸을 때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일반대중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걸핏하면 벌이는 재벌그룹 사옥 점거투쟁에서는 여태껏 느끼지 못해온 시원함과 통쾌함을 신나게 경험했다. 그야말로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안철수가 검증됐지만 늘 정해진 노선만을 운행하는 주류의 궤도를 과감히 일탈한 것에 대해 국민들은 그에게 지지율 50프로라는 전폭적 격려와 응원으로 화답했다.
오세훈의 뜬금없는 시장직 사퇴로 펼쳐진 2011년 가을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면에서 안철수가 찍었던 여론조사 지지율 50프로는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불멸의 대기록으로 의연히 버티고 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나고 압도적인 수치냐 하면 당시 여당과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자로 각각 거론되던 나경원 전 의원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지지도는 전자가 22퍼센트, 후자가 15퍼센트였다. 거대 양당에 소속된 두 거물급 여성 정치인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도 안철수에게 오차범위 훨씬 바깥에서 뒤지는 양상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하고도 1년이 더 지났다. 여론조사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허나 여론조사는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아니하되 많을 것을 말해주기는 한다.
올해 8월 초에 실시된 리서치뷰의 범보수 차기 지도자 적합도에서 안철수 의원의 지지도는 전체 응답자 기준으로 6위로 내려앉았다. 안철수를 앞지른 인물들을 순위대로 열거하면 한동훈 법무부 장관, 홍준표 대구광역시장,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유승민 전 바른정당 대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다. 보수세력에 속하는 인물들 사이에서도 6위이니 진보진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까지 전부 통틀어 합산할 경우 안철수는 10위권 안팎으로 밀려날 듯하다.
한마디로 처참하다.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은 10년 넘게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어왔음에도 안철수가 정치시장에서 상장폐지 단계까지는 가까스로 추락하지 않았다는 거다.
문제는 그가 그나마 상장기업의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원인이 국민들의 지지가 아니라 각종 선거철마다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연출되어온 안철수의 기기묘묘한 정치공학적 움직임에 있었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민심으로 구동되는 인기 많은 대중정치인으로부터 이준석이 경멸적으로 지칭한 ‘그 섬’, 곧 여의도의 기득권 정파들 간 이합집산으로 지탱되는 전형적인 구태정치인으로 시나브로 주저앉은 모습이다.
안철수는 자신의 쇠락이 주류 대열로의 진입에 실패해 야기된 참사라고 총화한 듯싶다.
그런데 안철수의 1차 몰락은 문재인과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야권후보 단일화로 촉발됐다. 2차 몰락은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하는 형식으로 민주당에 돌연 입당한 결정으로 초래됐다. 그는 이후 정동영, 천정배, 박지원, 손학규, 유승민 등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띤 정치인들과의 합종연횡을 통해 재기와 반전을 도모했으나 결론은 항상 추가적 몰락이었다. 단지 1ㆍ2차 몰락과 비교해 3차, 4차, 5차 몰락의 낙폭이 적었던 덕분에 몰락이 몰락으로 체감되지 않았을 뿐이다. 기실 20프로에서 10프로로 떨어지는 게 충격이지, 2프로에서 1프로로 낮아지는 건 아무 통증을 안기지 못할 수가 있다.
안철수는 타이슨의 명언을 기억해야
이제 안철수는 주류에 편입하려는 마지막 비장의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현상’이 한반도 남쪽을 강타할 무렵의 그의 짱짱하고 위풍당당했던 면모를 회상한다면 천하의 안철수가 이명박 정권의 잔당으로 치부되는 장제원 의원이나 권성동 의원 등과 제휴하는 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엽기적인 사태 전개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DJP 연대를 추진할 즈음에는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목표한다는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이 담보돼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삼당합당을 강행해 군사독재정권의 후예들과 당을 같이했을지언정 당의 주류였던 민정계를 시종일관 공세적으로 압박해 마침내 그의 무릎 아래로 굴복시켰다.
심지어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사돈지간인 고 최종현 회장이 경영하는 회사였던 선경그룹(현의 SK)을 정조준해 직격하는 독설과 극언마저 수시로 불사했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 하락 현상의 주범으로 손꼽히는 김건희 여사 문제를 좀처럼 정면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안철수의 소심함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YS 특유의 배포이자 결기였다.
윤핵관과 손잡고 당권을 장악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윤석열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면 보수표도 먹고 중도표도 먹는 식의, 꿩 먹고 알 먹기로 정권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안철수 본인과 그 주의 인사들의 계산이자 통밥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막상 링 위에서 얻어맞기 전까지는.”
과거 헤비급 세계챔피언으로 명성을 날렸던 권투계의 슈퍼스타 마이크 타이슨의 이 유명한 명제는 어쩌면 안철수 의원에게도 해당될 듯싶다. 안철수는 이준석이 윤석열에게 단숨에 제압될 걸로 기대 겸 예상을 했겠지만, 쉽고 간단하게 완료될 것으로 전망됐던 이준석 숙청 작업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만 반 토막 낸 채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오히려 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유승민만 엉뚱하게 ‘부활당한’ 상황이다. 한국정치에서 살아 있는 권력에 영합하는 주류의 길은 잠시 살려다가 영원히 죽는 길임이 다시금 증명된 셈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한다. 더 이상 몰락하고 싶어도 몰락할 데가 없는 입장이 작금의 안철수의 객관적인 현실정치적 위상이다. 안철수는 본인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믿으며 윤핵관들과 덜컥 명분도 없고, 실익도 없는 무모하고 무익한 동맹을 맺었으리라.
그러나 윤핵관들의 본거지는 호랑이굴이 아니었다. 동물원이었다. 안철수가 영락없는 동물원에 갇힌 애처롭고 무기력한 맹수 신세가 된 이유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동물원 사육사들이 던져주는 싸구려 정크 푸드 사료에 나날이 길들여지는 중이다. 일반 남성이 초식동물로 변하면 마음에 드는 여성과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걸로 끝난다. 한때 잘나가고 유력했던 정치인이 초식동물로 길들여지면 민심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정치인생이 마감된다.
그래서 필자는 안철수 의원에게 그가 왕년에 기염을 토하며 했던 이야기를 살짝 번안해 진심어린 조언으로 돌려주고 싶다. 안철수는 완전히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기 전에 윤핵관 동물원을 어서 빨리 탈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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