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 앞에는 와신상담이 있었다
토사구팽의 고사성어가 월나라 군주 구천의 오나라 임금 부차를 향한 처절한 복수혈전에서 비롯됐음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거대한 복수극의 연출자는 범여와 문종이라는 타국 출신의 두 걸출한 책사였다. 부차가 죽고 오나라가 멸망한 다음 범여는 문종에게 월나라를 함께 떠날 것을 권유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먹듯, 이제 그 효용가치가 다한 참모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구천이 나설 게 명확하다는 논리에서였다. 범여는 구천이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장경오훼(長頸烏喙)의 관상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얼굴의 소유자와는 고생은 같이해도 복락은 함께 누릴 수 없다며 문종을 설득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자세히 기록된 바대로 문종은 월나라에 잔류하기로 결정했고, 이윽고 구천은 문종에게 날이 시퍼렇게 산 칼 한 자루를 보내며 자결을 명령한다.
사마천은 인류사에 길이 남은 귀중한 역사서의 저자이다. 필자는 사마천이 범여의 입을 빌려 언급한 장경오훼는 외모가 아닌 성격 즉 인간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싶다.
목이 길다는 건 인내심이 강하다는 뜻이다.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다”는 낯익은 표현이 이를 상징한다. 입술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현실에 몹시 불만족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사람이 기분이 토라지면 보통은 입을 삐죽 내밀곤 하긴 마련임을 상기해보시라.
범여는 구천이 와신상담을 꾀하는 과정에서 마음속 깊은 화를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억눌러왔고, 오왕 부차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 지금은 군주의 가슴속에 커다랗게 응어리진 분노덩어리가 언제 어떻게 폭발한지 모른다고 동료 문종에게 완곡하게 경고했던 셈이다.
사실 범여는 내심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구천은 회계산 아래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부차에게 대패해 본인은 물론 왕비까지 오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적 조건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언제 고국으로 귀국할지 기약할 수 없는 답답하고 우울한 포로생활이었다. 부차가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낸다는 보장이 없었던 탓이다.
포로생활이 장기화되자 구천은 절망감에 휩싸였고, 주군을 수행해 오나라 궁성으로 따라온 범여가 한 가지 계책을 궁리해낸다. 때마침 부차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리니 오왕이 배설한 인분을 구천이 직접 먹어보라는 조언이었다. 아무리 비참한 포로 신세로 영락했다고는 하나 구천은 범여의 진언을 차마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범여는 나름 의학에 일가견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부차가 걸린 병이 죽을병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구천이 적국 수장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구천은 일단 한다면 하는 사내였다. 그는 금으로 만들어진 요강에 푸짐하게 담긴 부차의 배설물을 전연 싫은 기색 없이 손으로 연신 찍어먹었다. 그것도 먹방 전문 유튜버를 방불하게끔 맛있게 냠냠 찍어먹었다. 부차의 대변을 입안에 넣고는 요리조리 차분히 음미한 구천은 오나라 임금이 곧 쾌유할 것을 예언했다.
부차는 구천의 예측이 맞아떨어지자 월나라 군주의 귀환을 마침내 흔쾌히 허락했다. 오나라의 마지막 충신 오자서는 구천을 월나라로 송환해주는 조치는 사나운 호랑이를 산에 풀어주는 짓과 진배없다며 부차를 강력히 만류했으나 오나라 임금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차의 머릿속은 이 귀찮고 성가신 늙은 원로대신의 간섭을 빨리 물리치고 어둡고 아늑한 내실에서 서시를 안을 음탕한 욕망으로 꽉 차 있었다. 서시는 구천이 부차에게 뇌물 용도로 바친 월나라 최고의 경국지색의 미인이었다. 서시가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에 수많은 뭇 남성들이 설렘과 흥분으로 곧장 자지러졌다는 서시효빈(西施效嚬) 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그 여인이었다.
이준석, 넌 나 윤석열에게 모욕감을 줬어
귀국한 구천은 수시로 웅담, 곧 곰의 쓸개를 빨았다고 한다. 단순한 신체보양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기 입에 넣었던 부차의 역겨운 배설물 냄새의 기억을 어떻게든 잊으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구천은 쓰디쓴 웅담을 입안에서 혀로 굴리는 순간만은 부차의 시큼한 인분을 손으로 찍어 맛볼 적에 겪었던 수치심과 굴욕감을 잠시나마 지워낼 수가 있었다.
복수의 꿈을 이루고 춘추오패의 한 명으로 당당히 등극해 명실상부한 중원의 맹주로 웅비했음에도 구천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 사람 마음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다. 구천은 자신이 굳이 원수가 싸놓은 더러운 분뇨를 맛보지 않았어도 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차츰차츰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자 과거에 몹쓸 극단적 책략을 상주한 범여가 더욱더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범여는 구천의 이러한 심리상태의 변화를 그 옛날 주군과 나란히 오나라에 전쟁포로로 잡혀가 있던 시절부터 진즉에 꿰뚫어봤을 개연성이 짙다. 그가 문종에게 월나라 영토를 서둘러 벗어나자고 채근한 이유였다.
만약 범여가 월나라를 몰래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구천은 문종을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범여의 돌연한 망명은 꿩 대신 닭이라고, 범여 대타로 문종을 요절내는 구실이 되었다. 이 모든 비극의 발단은 범여가 그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구천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데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면 후반부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박근혜 정권 치하에서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패기 있게 선언했던 때일까? 문재인 정권의 검찰총장직을 전격적으로 사퇴했던 시점일까?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 공식적으로 승리가 확정된 순간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김건희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던 날일까?
필자는 윤석열 대통령의 인생 후반전은 2022년 1월 6일 목요일 오전 출근시간대에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이 날은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지하철 여의도역 5번 출구 근처에서 냉담하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를 휑하니 스쳐지나가는 시민들을 향하여 30여 분간 90도로 허리를 정중히 굽히며 인사를 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태어나서 이렇게 수없이 남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던 기억은 없으리라
이 날의 지하철 인사는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윤석열이 더는 오만하지 않다는, 독선적이지 않다는, 권위주의적이지 않다는, 꼰대도 아니고 기득권자도 아니라는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자리매김했다. 구천이 스스로를 인정사정없이 망가뜨려 숙적 부차의 신뢰를 얻었듯, 윤석열 역시 자신을 지하 수십 층 깊이까지 끌어내림으로써 민심의 흐름을 거머쥐었다.
1월 6일의 지하철역 출근 인사는 이준석 대표가 이른바 연습문제 형식으로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시한 사즉생의 절박한 선거운동 방법이었다. 구천 못잖게 윤석열도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아이디어의 제안자인 이준석 본인도 윤석열 후보가 그토록 열심히 적극적으로 출근인사를 하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범여도 구천이 그렇게까지 능청스런 태도로 부차의 똥을 찍어먹을 줄은 몰랐더랬다.
구천이 부차에 대한 보복 임무를 완료한 것처럼 윤석열은 대통령 당선의 목표를 달성했다. 인간은 고대해온 소기의 목표를 이룩하면 목표를 이루고자 채택ㆍ동원했던 방도들의 상당수가 과도하고 쓸모없는 수단이었다는 믿음을 뒤늦게 갖기 쉽다. 내가 왜 저런 생고생을 자청했는지 배부르고 간사한 후회감이 막심하게 밀려오는 것이다.
그 후회를 구천은 범여를 토사구팽시킴으로써 달래려 시도했다. 한국의 대표적 느와르 영화인 「달콤한 인생」에서 김영철이 이병헌에게 내뱉은 저 유명한 대사를 잠깐 차용하자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으니까.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연이어 빛나는 승리로 견인하면서 이준석은 그의 본의가 어떠했든 윤석열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대통령이라는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윤석열에게 당대표 이준석의 기여와 공헌은 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준석으로 인해 느낀 억울한 모욕감만이 밤낮으로 새록새록 솟아날 뿐이다. 윤석열이 이준석이 출제한 연습문제를 씩씩거리며 풀면서 경험했을 모욕감은 권성동 원내대표와 장제원 의원을 위시한 세칭 윤핵관들이 이준석을 당대표직에서 제거ㆍ숙청하는 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국정동력보다는 숙청동력이 긴요하고 우선적인 양상이라고 하겠다.
범여가 도주하고 문종이 처단된 월나라는 그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해 종내에는 초나라에게 허망하게 복속되고 말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여론조사 지지율도 범여와 문종이 사라진 월나라의 국운 같이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평행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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