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우스(BC 275년~BC 203년)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이었다. 테베레 강가에 놀러온 헤라클레스가 요정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의 아들이 가문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요정이 아니라 인간의 여인과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고도 하지만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므로 필자는 통 크게 그냥 요정이라고 인정해주고 싶다.
파비우스 가문에서 그가 등장하기 이전에 제일 유명했던 인물은 룰루스였다. 이 책의 주인공인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바로 이 룰루스의 4대손이다.
파비우스가 헤라클레스의 후예도, 요정의 자손도 아님은 그의 어린 시절 별명만으로 단번에 확인된다. 그는 ‘새끼 양’으로 불렸다. 성격이 나이답지 않게 온순하고 신중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몹시 순종적이어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남을 이끌기보다는 바보같이 남의 이끌림을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낭중지추라고, 헤라클레스 같이 담대하지도, 요정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았음에도 나이를 먹어 사회생활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이 되자 그의 진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무기력한 게 아니었다. 쓸데없는 격정에 휘둘리지 않을 뿐이었다. 소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신중했을 따름이었다. 순발력이 떨어진다는 체질상의 약점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부족한 순발력을 지구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상쇄시킨 덕분이다.
로마는 정치와 전쟁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가는 전형적인 정복국가였다. 따라서 신체의 단련과 두뇌의 훈련이 병진되어야 출세의 기회가 찾아왔다.
파비우스는 적을 무찌르는 자연산 무기인 몸을 부지런히 다듬음과 아울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종 병기인 입심을 쉬지 않고 키워나갔다. 그는 본인의 삶의 방식에 어울리는 연설 기법을 개발했다. 과장된 수식어나 허풍 섞인 군더더기 말들을 모두 빼고 담백하고 품격 있는 웅변술을 지향해나갔다.
파비우스는 통틀어 다섯 차례에 걸쳐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그가 첫 번째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남긴 치적은 리구리아 족을 대파한 사건이었다. 파비우스에게 크게 혼쭐이 난 리구리아인들은 알프스의 산속으로 도망간 다음 다시는 이탈리아 본토를 얼씬거리지 않았다.
한니발이 로마에 몰고 온 공포와 충격에 견주면 리구리아 사람들의 약탈과 습격은 귀찮은 민폐 수준에 불과했다. 트레비아 강 유역에서 치러진 전투에서의 승리에 한껏 기세가 오른 한니발의 군대는 에트루리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들이 로마인들을 몸서리치게 했는데, 그중 압권은 팔레리이 지방의 하늘로부터 석판이 떨어진 일이었다. 석판에는 이와 같은 소름 끼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제 마르스신께서 무기를 휘두르실 것이다.”
한니발이 군신 마르스가 지상에 현현한 존재라는 기분 나쁜 뜻이었다.
파비우스는 결국은 자연의 우연한 산물에 지나지 않을 흉조들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인들 사이에 만연한 공포심과 불안감이 문제의 본질임을 잘 알았다. 한니발만 물리치면 민심의 동요는 곧 진정될 터였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당장은 기세등등해도 모자란 병력과 열악한 보급사정으로 말미암아 상승세가 머잖아 꺾일 것임을 예상하고는 적과의 즉각적 교전을 피하는 노선을 택했다. 그는 싸움에 나서는 대신에 로마의 동맹국들과 위성국들이 한니발 진영에 가담하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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