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공희준 : 방송통신심의위원회(약칭 방통위)가 발표한 ‘https’ 차단 방침이 젊은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론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방통위를 앞세운 문재인 정부가 반대 여론을 의식해 일단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 같은 분위기인데, 비슷한 양상의 검열 시도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다수 누리꾼들의 우려입니다. 정권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상관없이 왜 우리나라 권력자들은 인터넷에 검열의 칼날을 본능적으로 들이대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이버 공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과연 현실적으로,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일까요?
감시와 통제는 다르다
이지헌 : https 차단 논란은 현재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있습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정부가 인터넷 세계, 즉 사이버 공간을 실제로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는지가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국가가 사이버 공간을 통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 믿음 때문에 방통위의 https 차단 계획이 일파만파의 파문을 불러왔습니다. 네티즌들의 믿음대로 정부가 실제로 인터넷을 감시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입니다. 어느 범위까지를 국가에 의한 감시로 간주해야 하는지도 따져봐야만 하고요.
정부는 자신들의 행동을 혹여 발생하지로 모를 범죄에 대한 예방활동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정부의 예방 활동을 국민들이 국가의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기능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용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문제의 핵심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감시와 통제는 층위가 다릅니다. 감시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통제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의미입니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는 파급효과를 차단하고 제어하겠다는 게 통제입니다. 저는 현재 단계는 감시 단계로 판별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통제 단계까지 나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은 이유에서입니다.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들 아래에서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공공연히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드러내놓고서 노골적으로 통제를 실시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문제인 정부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여론통제에 나섰다는 식의 평가와 시각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재인 정부에게 면죄부나 이른바 까방권까지 자동으로 발급해주는 건 아닙니다. 지금의 통제는 곧 온라인 통제를 가리킵니다. 통제의 문제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관철되어야 바람직합니다. 만약에 어떤 시민이 자기가 국가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감시가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부터는 어떠한 상황이 생겨나느냐? 감시의 주체로 특정된 해당 국가기관이 자기네 기구가 시민들을 의도적으로 감시하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의 결백을 책임지고 입증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주제인 https와 관련되어서든, 패킷(Packet)과 관련되어서든, SNI(Server Name Indication)과 관련되어서든 국가에 의한 감시가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큰 까닭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왜 젊은 누리꾼들에게 비호감이 되었나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 동기에서 사이버 공간을 감시하는지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릅니다. 정부는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의 안녕과 공공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감시를 수행한다는 논거를 내놓곤 합니니다. 그런데 왜 진보적 노선을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마저 온라인에 대한 국가의 감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상했는지를 논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감시가 기본적으로 정보의 속성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란 뭘까요? 정보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개념입니다. 그리고 정보는 시대의 변화에 조응해 그 성격이 달라져왔습니다. 과거의 정보는 굉장히 단선적이었습니다. 개인과 개안 사이에 일직선으로 주고받는 문자집합 또는 언어집합의 형태를 보통 띠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시대의 정보는 과거의 단선적 정보로부터 엄청나게 진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보의 소통경로와 이동방향이 복잡하고 다종다양해졌습니다.
정보의 성격이 급속도로 변한 것과 비례해 정보를 통제하는 작업의 성격도 근본적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정보의 통제=인터넷 통제”로 등식화되었습니다. 인터넷에 대한 감시가 정보에 대한 감시라고 묘사해도 전연 과장이 아닌 셈입니다.
단적인 사례로 현행 국가보안법에 명시된 ‘통신’ 행위는 연락을 주고받는 행위 아래에 포괄돼 있습니다. 이는 통신에 관한 매우 고전적 정의를 반영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개념의 상하관계와 주종관계가 사실상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통신이 연락의 하위범주가 더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통신의 하위범주가 소식을 주고받는 연락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은 당연히 옛날에는 없었던 기술입니다. 옛날에 없었던 이 인터넷이 종전부터 있어온 모든 가치와 관습의 역할과 의미, 내용과 맥락을 확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낡은 법과 제도로 신생 인터넷을 규율하려다 보니 억지가 생기고 무리수가 빚어졌습니다. 기존의 법률은 단순한 연락행위를 주고받는 일을 규제하도록 기획되고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와 시스템으로써는 인터넷의 등장 이후 우리가 경험해고 수행해온 정보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교환 행위를 그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내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인터넷은 다양한 정보의 활발한 유통이 보장되고, 사상과 표현의 전면적 자유를 근간으로 삼는 폭넓은 정치적 자유가 보호되는 환경에서만 그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발현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온라인에서의 활발한 정보의 유통과 사상과 표현의 전면적 자유가 수시로 제약받아왔습니다. 정부가 인터넷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누더기처럼 짜깁기해 온라인 세계의 기율 확립과 질서 유지를 꾀해온 탓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에 대한 감시가 자행되고 있다는 네티즌들의 불만을 반박하고 해명하려는 정부의 논리가 매우 군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문재인 정부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인터넷 감시를 자행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정부가 나쁘다”는 여론이 호응을 획득해가는 배경입니다. (②편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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